“이런, 이런.”
머그잔에 가득 담긴 홍차를 마시며, 다른 한손으로는 결혼식 시간표를 보던 존이 입을 열었다.
“신랑 신부의 왈츠 타임이라니, 누가 이런 걸 집어넣은 거야?”
“메리가 이것저것 하자 그럴 때 옆에서 계속 고개 끄덕거리고 있었잖아. 조는 건줄 알았으면 깨워줄 걸 그랬군.”
셜록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존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 춤 못 추는 거 알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안 말리고 뭐했어.”
“나 없는 새에 배웠을 수도 있잖나. 그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셜록이 사려 깊은 척 빈정댔으나, 존은 그 정도 투덜거림에는 익숙했다. 그는 그저 다가올 고난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해서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허, 이런 거 해본지 너무 오래 됐는데.”
“그래?”
“졸업식 이후로는 한 번도 춘 적이 없단 말야.”
이봐, 메리한테 뭐라고 말해야 그냥 넘어가줄까. 그렇게 말하는 존이 웬일로 진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셜록은 약간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그는 비협조적이던 태도를 바꾸곤, 대수롭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흘렸다.
“연습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는 있어.”
“네가?”
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간단한 스텝이라면.”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 셜록이 거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허리를 곧게 펴고 팔을 드는 폼이 제법 그럴싸했다. 존은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미적미적 다가갔다. 가까이 오자, 셜록은 자연스럽게 팔을 여성 포지션으로 바꾸었다.
“이, 이렇게 하는 거였나?”
“리드는 하되 팔에 힘은 좀 빼고. 그래, 그렇게.”
항상 왼발이 먼저지. 구보와 같아 - 천천히 기본스텝에서 시작해서 방 한 바퀴를 다 도는 동안, 존은 몇 번인가 셜록의 구두를 밟았다. 그 때마다 존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네 키가 너무 커서 보폭 조절을 못 하겠는 거라며 툴툴댔다.
“썩 나쁘지 않은데.”
“무슨 소리야. 박자를 하나도 못 맞추겠는데.”
“연습 조금 하면 될 거야. 잊어버렸다더니 잘만 하는군.”
“너야말로, 이런 건 언제 배워둔 거야?”
사건현장에서 춤출 일은 없을 텐데, 라고 생각하던 존은 셜록이 행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숨어들기 위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잡기들을 떠올렸다. 그다지 어울리는 종목은 아니었지만, 그런 기술 중의 하나로 왈츠가 있는 것이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상 듣게 된 대답은 존의 예상을 벗어났다.
“어릴 때 배웠어. 교양으로.”
“여자 스텝을?”
“남자의 반대일 뿐인걸. 어려울 것 없지.”
존은 문득 누가 셜록에게 춤을 가르쳤을지 궁금해졌다. 설마하니 마이크로프트가. 그 양반도 춤추는 게 상상되지 않는 족속인 건 매한가지인데. 그는 잠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월등히 키 차이가 나는 꼬맹이 둘이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부모님과 친척들 앞에서 빙글빙글 돌며 우애를 자랑해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니야, 아니지. 그보다는 서로 발을 밟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게 틀림없어.
존이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알아 챈 셜록이 불쑥 내뱉었다.
“예상을 깨서 미안하지만, 난 원래 춤추는 걸 좋아해. 마이크로프트와는 전혀 다르다고.”
“완전 금시초문인걸. 전혀 몰랐어.”
“바이올린만큼 좋아하지.”
사건이 안 풀릴 때면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은 꽤 보았지만, 춤추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존이 되물었다.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잖아.”
“스텝을 외우는 것보다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한데, 혼자 출 수는 없으니까.”
“흠, 그도 그렇지.”
존이 낄낄 웃었다.
“나처럼 사람이 있어도 못 추는 것보단 그게 낫지 않아?”
“자네는 금방 잘 추게 될 거야.”
“그럴까?”
누구하고도 호흡을 잘 맞추니까 – 라고 말하려다가, 셜록은 말을 바꾸었다.
“난 좋은 선생이거든.”
“음, 확실히 좋은 선생이긴 하지. 완벽한 반면교사랄까.”
언젠가 아이가 태어나면 너처럼 사회성 없이 키우지는 않을 거라며 픽픽거리는 존을 향해 셜록은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천천히 두 사람의 발이 거실 한 중간에서 멈추었다. 상대의 어깨에 얹고 있던 손으로 존의 손을 그러 쥔 셜록은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렸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존.”
“...어, 어?”
“미안해.”
“저기, 농담이었는데.”
“진심으로.”
존은 잠시 이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방금 전 왈츠의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는 이런 타이밍에, 이런 식의 사과를 받을 것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의 키를 월등히 뛰어넘는지라 등 뒤에 서면 앞을 잔뜩 가려버리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인 친구는 지금 매우 작아보였다.
“정말로 미안한 건, 그 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는 거네.”
“......”
“그리고 만약 다시 그 때로 돌아간대도, 아마 똑같이 할 거라고 생각해.”
그게 나니까.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제거하고, 그 조직까지 없애버릴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연관된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니까.
그러나 돌아온 자신을 보고 존이 화를 냈을 때, 그는 처음으로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자신의 선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게 과연 '옳은' 방법이었을까. 마이크로프트와 자신이 선택한 ‘가장 좋은’ 방법이 가장 옳은 방법이기도 했던 걸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2년 동안 자네는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너는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그리고 언제나
완벽한 기억의 형태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2년 동안 외롭지 않았네.”
“......”
“뭐, 혼자 있을 때면 조금 심심하긴 했지만.”
그래서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다치게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외로움이라는 건 일반적으로 사람이 혼자가 되었을 때 느껴지는 공허감을 매우 낭만적이고 자기 위주로 포장한 감성적 표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게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 마이크로프트가 잘 맞지도 않는 자신을 끝내 곁에 두려 하고, 모리아티가 왜 그렇게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얽어매려 했는지도. 아마 그들은 영원히 그 단어의 정체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앞에서 되레 자기가 더 미안하다는 얼굴로 올려다보는, 이런 존재가 그들에게는 없으니.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이 메어와 셜록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은 다른 말이 하고 싶었다.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이 아닌 다른 말. 정말 미안하게도, 존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의 리스트의 어디에도 미안하다는 항목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 같이 감정이 희박한 사람은 존이 받아야 마땅할 만큼의 사과 같은 것은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불확실하고, 측량할 수도 없고,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는 감정을 넘겨짚어 아는 척, 이해하는 척 하는 그런 거짓말 대신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 만나게 되어 좋았고, 2년 만에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웠고, 네가 그동안 살아 있어서 기뻤고,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
네가 너라서
항상 너여서
그 때 그 옥상에서 하지 못했던,
고맙다는, 그런 말.
그러나 이 반사교적인 성정의 소유자는 그런 말은 다 접어둔 채, 이제 와 무슨 그런 소릴 다 하느냐며 멋쩍어 하는 친구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다행이야. 네가 나 같은 괴짜를 베스트 맨으로 선택하는 심히 반사회적이고 괴팍한 성격이라.”
“뭐야?”
“레스트라드는 우릴 보고 정반대라고 하는데 말야, 사실 우리 닮은 부분이 꽤 있는 거 알아?”
“...셜록,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내가 너랑 비슷한 부분이 요만큼이라도 있는지.”
내가 기대를 말아야지, 하며 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박자 맞추기 영 어려울 것 같으면 언제고 맞춤 연주로 보답할 테니, 메리가 보지 않을 때 연습이나 더 해오라며 셜록이 웃었다.
~*~
저녁 식사는 꼭 챙겨먹으라는 말을 하고 나오면서도, 수많은 물음표들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졌다. 담담히 말하던 목소리가 감동적이면서도 어딘지 쓸쓸해서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 때는-이라니, 그렇다면 지금은?
외롭지 않았다면, 고독했을까?
너는 도대체 어땠을까? 나 없이, 괜찮았을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나만큼 혼자였을까? 내가 네 무덤 앞에 섰던 많은 날들 중에, 한 번쯤은 너도 그곳에 있었을까? 혹시 그렇게 오랜 시간이 될 줄은 너도 몰랐던 게 아닐까? 그래서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그것도 이미 물어볼 시기가 지난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물어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저 고집쟁이가 속 시원히 대답할 리도 없지만, 그에게서 기어코 답을 듣는다면 자신은 221B의 검정색 문을, 사건과 아드레날린으로 가득 찼던 모험의 집을, 흥분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가 새로워서 지난 2년간 단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최고의 시절을 결코 떠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묻지 않았다. 행간에 숨어 다 전해지지 않을 진실을 그대로 두었다. 존은 열 일곱 개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한 때는 너무나 궁금해서 숨 쉴 때마다 떠올렸던 물음표들과 가끔 자신을 짓눌러 터트려버릴 것만 같았던 시간 전체를 221B의 방 안에 고스란히 두고. 피곤한 척, 부러 열 일곱 번의 발소리를 내면서. 아무도 세지 않는 제 집 앞의 계단을 관찰하듯, 어김없이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를 세고 있을 시선을 마침내 등진 채로. 의사는 환자를 치유할 때까지만 필요하고, 군인은 앞으로 전진해야 했으므로.
쓴다면 아마 6번 정도에 위치할 것 같아서 달아두는 제목입니다.
셜록 시즌 3 나오자마자 써둔 것인데, 시기는 302 정도.
퇴고 따위 없음. 방치하다 못해 파일이 삭아가고 있길래(..) 올려봅니다.
최근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