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오프닝 : 2006년 10월 12, 13일

이것은 제 모든 삽질에 대한 서곡입니다.

사상 최악의 오프닝


알고 있다.
이게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소리라는 것을.


언젠가 이 글을 읽을 그 누군가가 지금의 나처럼 어디 돌아다니는 건 꿈도 못 꿀 고3이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기회가 닿지 않아 유럽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이 기대와 환상과 뭐, 여타 그런 비슷한 것들만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작부터 사상 최악이라고 하는 내 이야기가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니 정말로 설령 내가 안 가고 싶은 학교에 억지로 떠밀려 보내지는 것 같은 기분(어쨌거나 가겠다고 결정한 건 본인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으로, 짐 싸는 것 조차 전날 새벽에 해치울 정도로 귀찮아하면서 평소에 외국에 나가는 걸 준비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저기 빈틈이 좀 많았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부작용이 되어 나타날 것은 없지 않은가.


무슨 소리인고 하니...


비행기표를 구할 때 추석 연휴와 겹치는 바람에 점 찍어 뒀던 항공사에서 싼값에 구입할 수 없었던 것은 뭐 그렇다 치고, 학생 신분에 걸맞게 일본에서 한번 정도 가볍게 경유하는 표를 산 것 까지도 좋은데 왜 거기서 하루나 자야 하는 걸까. 전에 미국에서 돌아올 때 바로 연결되는 항공편이 없어 나리타에서 하루 자고 돌아오는 것은 여독을 푸는 기분이라 괜찮았는데, 고작 2시간 정도 날아가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열 몇 시간을 날아야 하다니, 사람 할 짓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항공사가 그렇듯이 JAL의 수하물 규정도 미국과 유럽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 행의 경우에는 1인당 20kg 두 개를 부칠 수 있고, 들고 탈 수 있는 가방이 하나 인데 반해, 유럽 행의 경우에는 부칠 수 있는 짐이 1인당 20kg 한 개였다(..)

짐을 부치려고 가방 두 개를 트레이에 올려놓았을 때 새하얘지던 카운터 언니의 얼굴이 아직도떠오른다. 아하하하, 지금 딱 20KG짜리 가방 두 개 끌고 배낭 메고 있거든요(…)

어쩐지, 이상하게 짐 좀 많이 쌌다 싶었지. OTL


…해서 대개 컴팩트하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공항에서 가방 다시 싸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표표히 떠나곤 했는데 정작 본인이 그 짓을 해보니 만만치가 않더라는 이야기. 시간 넉넉하게 도착했는데도 가방을 3번이나 풀었다 말았다 하면서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탑승시간은 다가오고, 티켓팅하는 언니한테 우겨서 어떻게 28Kg까지는 봐주기로 했는데 남은 짐을 몽땅 등에 지고 타려니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결과적으로 4Kg overcharge를 물게 됐다. Jal은 규정상 Kg당 23000원(...)


님들아, 매너……
이러면 일부러 싼 표 산 의미가 없잖아. OTL


더불어, 살다 살다 이렇게 피곤한 비행은 처음이다. 출발하기 전에는 짐 때문에 삽질하고 돈 뜯겼지, 출발하고 나서는 10킬로 넘어가는 배낭 메고 다니느라 허리 뽀개질 것 같았지, 거기다 사상 최악의 window seat

-차라리 복도를 달라고 하고 싶은 커다란 날개 한 중간-


이동 징크스는 어김없이 또 발발해 옆에 앉은 일본인 아줌마 둘은 앉은 순간부터 파리 도착할 때까지 정말 미친 듯이 떠들지…… 우와, 덕분에 자다 깨고, 또 자다 깨서 기내용 와인 두 병과 독한 위스키 한 잔을 생으로 퍼 마시고 잠들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다섯 번 째 깨어나보니 고작 5시간이 지나있더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 으으,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아직 파리까지 5시간이나 남았고 아직 채 모스코바 조차 지나지 못했다. 이 아줌마들은 쇼핑 할 생각으로 파리에 가는 건지 맨 면세 가이드 북만 보고 있는데 웬만하면 말 붙여보고 싶지만 도대체 너무 자기들 세계에서 끼리끼리 떠들고 있으니 끼어들기도 뭣하고 (어차피 애니용 일본어밖에 못 알아 들으니깐 흑흑)

아아, 심심해라. 그나마 카메라랑 노트북 안 들고 탔으면 어쩔뻔했니. 위스키의 강한 알코올 발도 가셔서 지금 엄청 말똥말똥하다. 피곤한데 눈이 떠진다는 건 참 못할 짓인데, 이 상태로 파리 가서 양손에 이 짐 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당혹스럽고 헛헛할 뿐…


이 비행을 정말 가슴 속부터 헛헛하게 만들어 준 사실 하나를 추가하자면...


재워주겠다던 후배녀석, 떠나기 전날에 겨우겨우 전화 연락이 닿았는데, ‘언니, 죄송해요. 제가 좀 힘든 수업을 깡으로 듣고 있어서 도저히 재워드릴 수가 없어요.’


어이…, 라고 해 봤자 나 역시 늦게 연락한 탓이 있으므로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 나도 한학기에 경영대 전필 수학 계통으로 들으면서 논문 두 개 써봐서 졸업학기 바쁜거 알아. 근데 미리 알았으면 다른 도시로 들어가서 놀다가 갔을 텐데 지금 날더러 공항에서 숙소를 찾아 이걸 끌고 가라는 말이지, 그런 거지?

OTL



나의 잭도 지쳐서 피곤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안 그런가, 나만 그렇게 보이나. 그나마 스튜어디스 언니가 친절하게 안 해줬으면 다 들어 엎고 ‘김기사, 비행기 돌려.’ 했을지도 모른다. 준비를 제대로 안 해놓으니 피곤해지고 그러니 자꾸 이곳에 다 쓸 수도 없는 썩 좋지 않은 생각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이 불안과 초조함이 처음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갖는 기대나 두근거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애석하게도 나는 벌써 지쳐버렸다. 여행이고, 나발이고 치워버리고 싶으니 어쩐단 말이냐.





물론 이건 서곡일 뿐이었습니다. 11시간 앉은 자세로 잠도 못 자고 내려서, 1시간 반 동안 파리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적당한 숙소를 찾아, 8.5E짜리 공항버스를 타고 우연히 같이 앉게 된 일본인 여행객과 수다를 떨면서 오페라 하우스 앞에 떨어진 것 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부터가 또 문제였죠. 하필이면 그곳이 예의 그 라파예트Lafayette와 쁘랭땅 백화점 앞이라 사람이 좀 많아야죠. 양손에 20Kg, 등에 8Kg 지고 돌아다니면서 보무도 당당히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이 동네 택시는 저녁 7시가 넘어가니 단체로 집에 가서 밥 먹기로 작당이라도 했는지 뻥 아니고 정말 한 대도 안 서더라고요. 하하하, 생전 처음으로 지나가는 택시에 애원도 해봤어 OTL. 그야 물론 콜택시 부르면 되긴 하겠지만 숙소도 공항에서 정한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 정보가 저한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음하하하, 그래서 결국 한 두 시간 짐 들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후배한테 마지막으로 전화를 했더니…


‘어머, 언니. 글쎄, 오늘 수업 휴강된 거 있죠.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 (담배 뻐끔)
내가 무슨 말을 하리……
같이 짐 옮기고 맛있는 저녁 사 준 거 아니었으면 진짜 두고두고 한 맺힐 뻔 했어, 흑흑흑.


여하튼 그래서 이번 교환학생기(를 빙자한 로망을 쫓는 마녀의 여행담)는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시작된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뭐, 이 정도야 웃으셔도 괜찮아요, 훗훗훗

그나저나 제대로 보이는지 모르겠네요. 노트북에서 쓰고 친구 mp3를 usb 삼아옮겨서 긁어 붙인거라... lab컴에 아직도 한글 폰트가 없어서 원래 글자 크기대로 안보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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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6/11/11 00:09 | 중앙광장:방랑자의피리소리 | 트랙백 | 핑백(2)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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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여우비 at 2006/11/11 00:15
어머, 어떡해요... 죄송해요; 좀 웃었어요 ㅠ_ㅠ
그치만 지금 보면야 좀 그렇지만, 당시에 어찌나 짜증나고 힘들었을지 저도 상상이 갑니다. 저도 파리에서 공중전화 걸 줄 몰라 2시간여를 try 했는데, 이 사람들이 도와주지도 않고...불어 하나도 모르는데 영어는 눈뜨고 찾아봐도 없지, 참;; 이런게 또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만...절세마녀님은 정말..흑.

훗날 한 10년쯤 지나면, 내가 젊은시절 이랬어, 하며 웃을 날이 오실겁니다. 어쨌든 이런 글 쓸 정도로 지금 안정이 되셨다니 다행이에요. 함께 교환학생 시작한 입장이라 참 동지같네요. 아무튼 흥미롭게 시리즈 기다릴게요 :)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6/11/11 00:22
낄낄낄, 그래도 제가 남들보다 적응속도가 도를지나치게 빨라서 이 정도삽질이야 하하하하하하 프라하 편에서의삽질을 기대해주세요. 그건 정말 손가락질하며 웃을만 하거든요. 훗훗, 그나저나 불어 모르시면서 처음 가신 곳이 파리였으면 좀 힘드셨겠어요. 저야 몇 번 가본 동네지만서도 ....아니, 익숙한 동네에서 저만큼 삽질했다는게 좀 굴굴욕스럽지만
Commented by 정모씨 at 2006/11/11 01:02
어후 대단하시네요..저같으면 완전 패닉상태에 빠져버렸을텐데; 액땜하셨다 치시고- 이젠 별일없겠죠~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6/11/11 01:04
있다니까요 엄청 웃기는 삽질이 히히히히히히히
Commented by 김정훈 at 2006/11/11 02:49
나도 짐 다시 싸는 사람들 보고 비웃 비웃하고 비웃는데 앞으로 비웃으면 안되겠네. 나는 운 좋게(?) 좌석이 겹쳐서 베이징에서 빈까지 비즈니스 타고 갔는데 좌석 큰 거 말고도 좋은 게 그렇게 많이 더 있는 줄 처음 알았다. ㅎ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11/11 08:37
으아아아아아 잭!!!! 잭이 너무 처절해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ㅁ;
Commented by muru at 2006/11/11 18:55
으악...잭의 영혼을 울리는 저 포즈, 저 표정...그리고 마녀님의 이 서곡...ㅠ_ㅠ 정말 저같으면 준비 그런거 아예 못하고, 대책없이 가서 국제미아가 되었을거에요...;ㅅ; 지금은 좀 괜찮으신지 걱정도 되고, 후배님 잘 만났다니 안심도 되고...
Commented by LOKIEL at 2006/11/12 04:03
크핫핫하하하하하핳 >_<
분명히 삽질한 거 맞는데 (토닥토닥) 저렇게 포스팅을 해버리면
동정보단 개그를 사지 않는가! 으흐흐흐 (그러므로 웃음 태클 반사)

윗글을 읽고 있자니 왜 알랭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 잠시 언급되는 Des Esseintes가 떠오르는 걸까 ㅋㅋㅋ
Des Esseintes라는 이 파리 신사양반, 디킨즈의 책을 읽다가 불끈 영국의 소시민적인 일상을 직접 봐야겠어 라고 결심하고는, 겁나게 커다란 트렁크들 (분명 뽀대용 옷들과 모자들, 파이프와 기타 신사분의 체면을 살릴 온갖 물건이 들어있을), 우산과 지팡이들, 침대 리넨, 심지어는 양탄자까지 말아서 챙겨 하인들에게 그 무시무시한 짐들을 들리고서 기차를 타러 갔대지.

앞으로 보게 될 런던의 소시민적 정경, 디킨즈의 책에서 고대로 빠져나온 듯한 붉은 얼굴의 하녀들과 구겨진 모자를 쓰고 탁자에 앉아 파이프를 피우는 노동자들을 상상하며 신이 났던 이 양반, 문득 배가 고파졌대지. 그래 기차역 앞골목에 있는 영국식 주점에 들어가 자신이 상상한 대로인 영국적 분위기와 영국인들의 얼굴 사이에서 황소꼬리 수프, 스틸튼 맥주, 로스트비프와 감자 따위 (많이도 시켜먹는다)를 주문해 먹었다네. 마치 런던의 여느 주점에, 혹은 디킨즈의 이야기 한가운데에 들어와있는 듯한 기분으로 말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진짜 런던으로 실어다줄 기차가 도착하니까
이 양반, 무지하게 귀찮더라는 거지.
'이미 그들의 풍습과 음식과 향취와 사람이며 날씨를 알겠는데 뭐하러 익숙치 않은 침대칸을 참아내고 짐꾼을 부르려 안달하며 줄을 서고 기다리며 추위에 시달리느라고 런던에 대한 내 환상을 꺤단 말인가?' 하는 심정으로 깔쌈하게 그의 트렁크와 지팡이와 우산과 양탄자와 파이프와 하인들을 데리고 첫 기차로 자신의 빌라로 돌아갔다고 하네.

ㅋㅋㅋㅋ 역시 여행의 절반은 환상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하지만 그 과정(이라 쓰고 삽질이라 읽는다) 마저 이처럼 재기있게 담아내고 막상 도착하면 그곳의 공기를 십분 즐기는 너라면 위의 Des Esseintes 거시기 하는 인물보다야 백배 나은걸 :D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6/11/13 20:34
김군//내 친구 중에도 그런 행운을 겪은 적이 있다던데 난 비행기하고는 영 그런 적이없어서 말이지.

살자님//낄낄낄, 사실 저 잭은 일본 공항 호텔에서 자기 전에 찍은 거지만요. 그나저나 날씨 더 나빠지기 전에 님하가 열심히 사진 찍고 잃어버리신 동화나라(..) 뇌르틀링엔 가서 사진 찍어와야 할텐데 그쵸?

무루님//우..우훗..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대책없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어요;_;

키엘//...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삽질로 동정을 받기엔 내 배낭 여행 레벨이 너무 높잖앙. 돈 있고 한 쪽 가방엔 먹을게 잔뜩있어서 별로 걱정은 안했는데 다만 좀 스트레스는 심하게 발생하더군. 담부턴 여행지 숙소는 정해놓고 다니겠다고 결심했지. 그나저나 그 사람 기분 무지하게 이해되는 걸. 환상 없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고 그걸 굳이 깨러 갈 필요는 없잖..
Commented by 화야 at 2007/12/15 10:21
파리는 원래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는 개념이 아님..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7/12/19 03:21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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