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제 모든 삽질에 대한 서곡입니다. 사상 최악의 오프닝
알고 있다. 이게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소리라는 것을.
언젠가 이 글을 읽을 그 누군가가 지금의 나처럼 어디 돌아다니는 건 꿈도 못 꿀 고3이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기회가 닿지 않아 유럽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이 기대와 환상과 뭐, 여타 그런 비슷한 것들만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작부터 사상 최악이라고 하는 내 이야기가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니 정말로 설령 내가 안 가고 싶은 학교에 억지로 떠밀려 보내지는 것 같은 기분(어쨌거나 가겠다고 결정한 건 본인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으로, 짐 싸는 것 조차 전날 새벽에 해치울 정도로 귀찮아하면서 평소에 외국에 나가는 걸 준비하는 것과는 달리 여기저기 빈틈이 좀 많았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부작용이 되어 나타날 것은 없지 않은가.
무슨 소리인고 하니...
비행기표를 구할 때 추석 연휴와 겹치는 바람에 점 찍어 뒀던 항공사에서 싼값에 구입할 수 없었던 것은 뭐 그렇다 치고, 학생 신분에 걸맞게 일본에서 한번 정도 가볍게 경유하는 표를 산 것 까지도 좋은데 왜 거기서 하루나 자야 하는 걸까. 전에 미국에서 돌아올 때 바로 연결되는 항공편이 없어 나리타에서 하루 자고 돌아오는 것은 여독을 푸는 기분이라 괜찮았는데, 고작 2시간 정도 날아가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 열 몇 시간을 날아야 하다니, 사람 할 짓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무슨 생각으로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항공사가 그렇듯이 JAL의 수하물 규정도 미국과 유럽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미국 행의 경우에는 1인당 20kg 두 개를 부칠 수 있고, 들고 탈 수 있는 가방이 하나 인데 반해, 유럽 행의 경우에는 부칠 수 있는 짐이 1인당 20kg 한 개였다(..)
짐을 부치려고 가방 두 개를 트레이에 올려놓았을 때 새하얘지던 카운터 언니의 얼굴이 아직도떠오른다. 아하하하, 지금 딱 20KG짜리 가방 두 개 끌고 배낭 메고 있거든요(…)
어쩐지, 이상하게 짐 좀 많이 쌌다 싶었지. OTL
…해서 대개 컴팩트하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공항에서 가방 다시 싸는 사람들을 비웃으며 표표히 떠나곤 했는데 정작 본인이 그 짓을 해보니 만만치가 않더라는 이야기. 시간 넉넉하게 도착했는데도 가방을 3번이나 풀었다 말았다 하면서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탑승시간은 다가오고, 티켓팅하는 언니한테 우겨서 어떻게 28Kg까지는 봐주기로 했는데 남은 짐을 몽땅 등에 지고 타려니 그것도 한계가 있어서 결과적으로 4Kg overcharge를 물게 됐다. Jal은 규정상 Kg당 23000원(...)
님들아, 매너…… 이러면 일부러 싼 표 산 의미가 없잖아. OTL
더불어, 살다 살다 이렇게 피곤한 비행은 처음이다. 출발하기 전에는 짐 때문에 삽질하고 돈 뜯겼지, 출발하고 나서는 10킬로 넘어가는 배낭 메고 다니느라 허리 뽀개질 것 같았지, 거기다 사상 최악의 window seat
-차라리 복도를 달라고 하고 싶은 커다란 날개 한 중간-
이동 징크스는 어김없이 또 발발해 옆에 앉은 일본인 아줌마 둘은 앉은 순간부터 파리 도착할 때까지 정말 미친 듯이 떠들지…… 우와, 덕분에 자다 깨고, 또 자다 깨서 기내용 와인 두 병과 독한 위스키 한 잔을 생으로 퍼 마시고 잠들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다섯 번 째 깨어나보니 고작 5시간이 지나있더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 으으,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아직 파리까지 5시간이나 남았고 아직 채 모스코바 조차 지나지 못했다. 이 아줌마들은 쇼핑 할 생각으로 파리에 가는 건지 맨 면세 가이드 북만 보고 있는데 웬만하면 말 붙여보고 싶지만 도대체 너무 자기들 세계에서 끼리끼리 떠들고 있으니 끼어들기도 뭣하고 (어차피 애니용 일본어밖에 못 알아 들으니깐 흑흑)
아아, 심심해라. 그나마 카메라랑 노트북 안 들고 탔으면 어쩔뻔했니. 위스키의 강한 알코올 발도 가셔서 지금 엄청 말똥말똥하다. 피곤한데 눈이 떠진다는 건 참 못할 짓인데, 이 상태로 파리 가서 양손에 이 짐 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당혹스럽고 헛헛할 뿐…
이 비행을 정말 가슴 속부터 헛헛하게 만들어 준 사실 하나를 추가하자면...
재워주겠다던 후배녀석, 떠나기 전날에 겨우겨우 전화 연락이 닿았는데, ‘언니, 죄송해요. 제가 좀 힘든 수업을 깡으로 듣고 있어서 도저히 재워드릴 수가 없어요.’
어이…, 라고 해 봤자 나 역시 늦게 연락한 탓이 있으므로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 나도 한학기에 경영대 전필 수학 계통으로 들으면서 논문 두 개 써봐서 졸업학기 바쁜거 알아. 근데 미리 알았으면 다른 도시로 들어가서 놀다가 갔을 텐데 지금 날더러 공항에서 숙소를 찾아 이걸 끌고 가라는 말이지, 그런 거지?
OTL
나의 잭도 지쳐서 피곤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안 그런가, 나만 그렇게 보이나. 그나마 스튜어디스 언니가 친절하게 안 해줬으면 다 들어 엎고 ‘김기사, 비행기 돌려.’ 했을지도 모른다. 준비를 제대로 안 해놓으니 피곤해지고 그러니 자꾸 이곳에 다 쓸 수도 없는 썩 좋지 않은 생각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이 불안과 초조함이 처음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갖는 기대나 두근거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애석하게도 나는 벌써 지쳐버렸다. 여행이고, 나발이고 치워버리고 싶으니 어쩐단 말이냐.
물론 이건 서곡일 뿐이었습니다. 11시간 앉은 자세로 잠도 못 자고 내려서, 1시간 반 동안 파리 공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적당한 숙소를 찾아, 8.5E짜리 공항버스를 타고 우연히 같이 앉게 된 일본인 여행객과 수다를 떨면서 오페라 하우스 앞에 떨어진 것 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부터가 또 문제였죠. 하필이면 그곳이 예의 그 라파예트Lafayette와 쁘랭땅 백화점 앞이라 사람이 좀 많아야죠. 양손에 20Kg, 등에 8Kg 지고 돌아다니면서 보무도 당당히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이 동네 택시는 저녁 7시가 넘어가니 단체로 집에 가서 밥 먹기로 작당이라도 했는지 뻥 아니고 정말 한 대도 안 서더라고요. 하하하, 생전 처음으로 지나가는 택시에 애원도 해봤어 OTL. 그야 물론 콜택시 부르면 되긴 하겠지만 숙소도 공항에서 정한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 정보가 저한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음하하하, 그래서 결국 한 두 시간 짐 들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후배한테 마지막으로 전화를 했더니…
‘어머, 언니. 글쎄, 오늘 수업 휴강된 거 있죠.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요.’
...... (담배 뻐끔) 내가 무슨 말을 하리…… 같이 짐 옮기고 맛있는 저녁 사 준 거 아니었으면 진짜 두고두고 한 맺힐 뻔 했어, 흑흑흑.
여하튼 그래서 이번 교환학생기(를 빙자한 로망을 쫓는 마녀의 여행담)는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시작된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뭐, 이 정도야 웃으셔도 괜찮아요, 훗훗훗
그나저나 제대로 보이는지 모르겠네요. 노트북에서 쓰고 친구 mp3를 usb 삼아옮겨서 긁어 붙인거라... lab컴에 아직도 한글 폰트가 없어서 원래 글자 크기대로 안보이거든요. 닫기
# by 절세마녀 | 2006/11/11 00:09 | 중앙광장:방랑자의피리소리 | 트랙백 | 핑백(2)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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