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편을 이어서 쓸까 하다가 밤새서 사진 700장 편집한 김에 그냥 스페인부터 쓸랍니다. 니스랑 프라하는 반쯤 썼으니 언젠가 올리겠죠. 이게 다 닥터 후 때문.“있지, 이사를 열 번도 넘게 다녔는데 내 평생 가장 공항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렇게 바보 같은 방법으로 가기는 처음이야.” “근데 그거 아세요? 우리 앞으로 여기 두 번이나 더 와야 한다는 거?”[4] 애증의 스페인 - (1) 떠나주겠어!
때는 3주 전, 유럽을 누비는 수많은 저가항공사들 가운데, 마침 제 살 깎아먹기 식 세일을 하고 있던 Ryan air 에서 스페인 행 왕복 비행기 티켓을 단돈 28유로(약 35000원)에 예매하는데 성공한 나와 하이디는 장장 6일 간의 여행을 앞두고 바로 그 전날까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 비수기에 숙박지라든가 여행지 정보를 찾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지. 아니, 어디 호텔이 싸고 좋다더라, 어느 음식점이 맛있다더라, 어디 가서 무엇을 보아야 비로소 스페인에 온 보람이 있다고 말한다더라 같은 기본 정보는 물론 중요하고, 사실 나도 그런 걸 찾고 싶었다. 시간이 없었던 것도, 남들처럼 행선지 찾아놓고 우아하게 예매해서 안정적인 기분으로 다니고 싶었던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여행을 너무 자주 다니다 보면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무지무지하게 귀찮은 데다, 고작 하루 이틀 묵을 곳을 찾는데 지도 검색해서 호텔 위치를 추적(..)하고, 보안 강도가 높은 이 동네 전산실 컴퓨터와 싸우면서 카드결제 같은 걸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유럽에는 도시마다 인포메이션 센터라는 좋은 게 있고, 혼자 여행 다니면서 그 덕을 많이 보았던 터라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매우 사소하지만, 보다 시급하고, 어쩌면 이 여행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차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아 나 증말, 공항까지 어떻게 가라는 거야!!!! OTL
Frankfurt Hahn 공항은 국제선을 주로 운항하는 Frankfurt am Main 공항하고는 달리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작은 공항으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Kaiserslautern이라는 소도시와는 오히려 가깝다. 직선거리로 50km정도 인 것 같으니까 차를 타고 가면 대략 한 시간쯤 걸리려나. 그런데……
“어? 언니, 여기서 공항버스 없는데요?” “뭐? 그럴 리가 없어. 얘들 여기서 월드컵도 했는데?” “근데 공항 홈피에 들어가서 암만 찾아봐도 안 뜨는데요?” “에이, 설마. 기차는?” “Mainz나 Frankfurt 가서 갈아타래요.” “그러면 공항까지 가는 게 우리 왕복비행기표보다 비쌀걸.”
그랬다. 이곳은 생각보다 더 오지였다. 허허허, 이 ‘회와 바다가 없는 포항공대의 탈을 쓴 미군 부대 옆 양로원실버타운’, 역시 만만하게 볼 수 없군. 통신에만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교통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은 전부 자가용 몰고 다니라는 거야, 그런 거야? 이 와중에 나더러 정말로 차까지 몰라는 거야?
그래서 장장 이틀 동안 온 인터넷(심지어 카 풀 홈과 미니 밴 서비스 업체까지)을 뒤지고 이 동네 인포메이션 센터와 여행사를 찔러보며 Hahn 공항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Pm 10:00 집에서 나와 기차역까지 걸어간다. (버스가 8시면 끊기는 동네) 2. Pm 10: 47 옆 동네 Ramstein 람슈타인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탄다. (20분) 3. Pm 11:07 내려서 Landstuhl/Ramstein Shell Autohof 라는 정체불명의 버스 정거장으로 가서 기다린다. 4. Am 02:46 드디어 공항버스를 탄다. 5. Am 04:00 공항에 도착해서 또 기다린다. 6. Am 06:55 비행기 출발
(그리고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 6~1까지 반복한다.)
…아아 바보 같아. >-<-0
정작 스페인까지는 2시간 밖에 안 걸리는 상황.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확인한 뒤 쓴 웃음을 내뱉으며 우리는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표, 왕복 28 유로 밖에 안 하는데 그냥 버리고 기차를 타버릴까에 대해서 말이다. 아, 하긴 그건 또 그거 나름대로 10시간 넘게 타야 하니 허리 아프겠지. 돈은 몇 배로 들 테고. 하하하.
아씽..OTL
어쩔 수 있나. 우리는 차도 없고, 차 가진 친구도 없고, 설령 차 가진 친구가 있다 하더라도 새벽 4시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 정도의 파렴치함도 없었다. 그래서 짐을 싸고 걷기 시작했다. 보통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기차역까지 느긋한 기분으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겨울 별자리와 바람에 대해 이야기 했다. 언니, 카시오페아가 보여요. 그래, 진짜 보이네. 언니, 바람이 찬데요. 괜찮아,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리하여 한 시간쯤 후 람슈타인 기차역에서 내렸을 때, 우리는 이 여행길이 결코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너무 많은 방법을 모색하다가 정작 위에서 말한 정체불명의 버스 정거장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였달까. 보통 공항버스가 아무리 그래도 그 동네 기차역쯤은 지나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 문제였을까, Shell Autohof라는, 너무나도 주유소 같은 이름을 보며 어렴풋이 느낀 위화감을 그냥 지나친 게 문제였을까, 이 주유소가 다시 보니 너무나도 고속버스 대로변에 있을 것 같다는 게 문제였을까.
아냐, 이 동네 위치가 제일 문제야. OTL
그렇게 생각하며 바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택시기사 휴게소에 가서 물었다. 알고 보니 버스 정거장은 Landstuhl과 Ramstein 사이에 있는 좀 큰 휴게소같이 생긴 주유소에 아주 잠깐 정차했다가 가는 것이라, 심지어 도시 안에 있지도 않았다. 벽에 붙은 지도를 봤더니 길이 어렵지는 않아서 웬만하면 걸어갈 수 있을 듯 했다. 다만 밤 11시, 가로등도 없는 거리의 칠흑 같은 어둠이 우리를 향해 ‘늬들이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조롱하고 있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우리, 인간적으로 이런 길을 짐 끌고 밤 열한 시에 걸었다간 나중에 부모님한테 한 소리 들을 것 같지 않냐?” “음, 물론 그렇겠죠.” “택시타면 8유로 나올 거래. 아저씨들이.” “비싸진 않은데 시간 많잖아요?” “3시간 정도 있는데…음, 역시 그렇지?” “우리 그냥 평소 하던 대로 일관성 있는 소비를 하도록 해요.”
그래서 걸었다. >-<-0
아니, 이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억울해서였다. 고작 50km밖에 있는 공항에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가는 것도 바보 같은데, 여기다 택시까지 타면 바보에 멍청이 말미잘까지 될 것 같았으니까. 게다가 하루에 일곱 번 밖에 안 지나다니는 버스라 우리에게는 어차피 시간도 많았으므로.
여하튼 그래서 이 여행의 영예로운 첫 사진은 독일 어느 구석에 붙어있는지 알지도 못할 만큼 구석진 동네의 지도가 장식하게 됐다. 가로등이 켜지지 않는 시커먼 숲 사이에 놓인 자전거 도로를, 알량한 야간 기차 여행용 램프로 발 밑만을 간신히 밝히고는 2인치 정도의 카메라 뷰 파인더로 희미하게 보이는 지도를 따라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것처럼 꼬리를 길게 끌고 따라왔다. 숲에서 흘러나오는 겨울바람이 발목을 스치고 지나는 것만 아니었다면 꽤 낭만적인 밤 산책이었다.
……
잠깐 우리, 분명 스페인에 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좀머 씨가 열댓 명은 튀어 나올 법한 숲길을 오밤중 한가운데 걷고 있는 거지. OTL
“언니를 만나기 전까지 이런 식으로 여행 다닌 적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난들 그랬겠냐고.”
여하튼 그랬다고요. 한국도 아니고 유럽 한복판에 사는 와중에 고작 스페인에 가면서 먼 대륙에 떨어져있는 성지를 향하는 순례자라도 된 기분이 되어야만 했지뭡니까. 아니, 전 그냥 알함브라와 구엘공원에 가보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특별히 무슨 대단한 영광을 바란 게 아니라니란 말입니다. 닫기
# by 절세마녀 | 2006/11/24 23:17 | 중앙광장:방랑자의피리소리 | 트랙백 | 핑백(2)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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