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해가 나면 집들이 저렇게 예쁘다는 거지?” “대체 우리가 어제 본건 뭐였던 거죠?” (4) 환상의 토마토를 찾아서
전 날, 비 내리는 알함브라에서 그라나다를 내려다보면서 ‘여긴 동네가 예쁘다기보다는 알함브라가 너무 끝내주는 건가 봐.’라고 생각하던 우리. 그도 그럴 것이 그라나다의 건물들은 대부분 흰 벽에 갈색(혹은 적색)지붕을 쓰고 있는데 그 빛깔이 다들 퇴색한 듯 선명치 않아 직사광선이 거의 없었던 어제 같은 날에 보니 사실 관광지 치고 약간 그러니까 뭐랄까 정말로 쪼끔이지만, 빈티 나 보이는 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랄까…언덕 위의 다른 세계인 알함브라 궁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에서의 속세랄까, 여하튼.
(이런 창백한 느낌?)
“우린 왜 어제 같이 비 오는 날에 관광을 하고, 오늘 같이 화창한 날에 버스를 타야 하는 걸까?” “그걸 알면 제가 진짜 외계인이게요?”
딱 맞춰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숙소에서 꽤 먼 시내 외곽에 위치하고 있던 버스 정류장. 길은 좁고 복잡해 차들이 얽혀 막히고 있었다. 호스텔을 나와 시외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조금 불안해 하며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았을 때, 설마 버스가 정시 출발하지는 않겠지?” “드물게 날씨까지 합세해서 우리를 놀리고 있다는 게 언니의 지론 아니었어요?” “그랬지. 하지만 공항버스도, 어제 공연도 사람이 차야 시작하는 시스템이었잖아.” “허를 찔러서 제 때 출발할 지도요.”
잽싸게 달려가 표를 사고 돌아보니,
...... 역시 놀리고 있는 게 맞았다. 제 시간에 출발해버린 야속한 버스여 >-<-0 OTL
“다음 차 한 시간 반 뒤에 있대요. 그 동안 뭐하며 기다릴까요?” “어쩔 수 없군. ’너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나 하지.’ 틀림없이 재미있을 거야.” “갑자기 왠 <대부>는… 뭔데요?”
“슈퍼마켓 투어.”
“……” “왜,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 건데. 그 나라 사람들이 어떤 걸 먹고 마시고, 어떤 가격으로 사는지 알고 싶으면 그 동네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갈 법한 슈퍼마켓에 가봐야 해. 게다가 이건 시간에 쫓기는 배낭 여행객, 우르르 몰려다니는 단체 손님, 돈 많은 호텔팩 프로그램 이용객 마인드로는 절대, 네버, 에버, 할 수 없는 거라고. 평소 패턴대로 희소한 문화 체험의 한 코스라 여기도록 하렴.” “저기, 이런 건 애초에 ‘패턴’도 아니고 그냥 어제 날씨가 나빴을 뿐이라고요.” “그리고 그런 물가 조사에는 대형마트가 제격이지.” “전혀 안 듣고 있네. 아무튼 그 마트는 어딨는데요?” “정문을 나가서 오른쪽, 그 다음 길 건너서 왼쪽. 아까 버스 타고 오면서 봤어.”
어제 내린 비가 무색할 정도로 해맑은 대낮에 정류장 안에서 한 시간 반이나 죽치고 있기도 뭣해서 오기 직전에 보였던 대형 마트에 과일이라도 살까 해서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프라하의 Albert 이후, 우리의 운명과도 같은 Alcampo를 만났던 것이었던 것이다.
“우와, 과일 진짜 싸다.” “역시 관광지 바로 옆 편의점과는 차원이 다른 품질과 가격이군. 종류도 많고, 아, 향기도 좋아.” “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하몽이라는 건가 봐요. 시식해 봐야지.” “헛, 마, 맛있는 걸. 하나 사서 점심 때 샌드위치 해먹자.” “오키오키. 전 염소 치즈 살래요.”
하몽과 과일과 온갖 과일 주스와 한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와인에 광분하느라(…) 미처 사진은 못 찍어왔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나라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라기보다는 전자 기기 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가. 아니, 우리 눈에 식품류만 들어왔던 것일 수도 있지만.
“토마토, 오렌지, 석류, 주스랑 그리고 또…잠깐, 와인은 왜…?” “…아니, 그냥. 색깔이 너무 예쁘잖아. 빨갛고…” “무겁잖아요.” “괜찮아, 내 트롤리는 나보다 일 잘 하니까.” “그래도 무거울 텐데, 뭐에 쓰게요. 중요한 거에요?” “항상 뭐든 게 중요하지.” “……” “……” “이제 완전 자동으로 나온다, 그 대사(닥터 후)… “ “자, 아무튼 다 나중에 쓸 데가 있다고, 훗훗훗훗. . 엇!!세상에, 샹그리아를 쥬스처럼 판다." "우와, 그거 넣어요." "......술 싫다며.?" "술은 안 마셔도 샹그리아에는 약간 로망이 있죠."
과일과 와인과 하몽과 주스와 감자칩을 바리바리 싸들고 마침내 코르도바로 향하는 버스 안. 날씨가 화창하다 못해 구름 그림자가 납작하게 눌러 앉은 땅 위를 흘러가는 게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었지만, 그거야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대신 맛있는 점심을 먹게 되었으니 그걸로 된 거라며 우리는 우리의 전리품들을 끌어 앉고 자리에 앉았다.
“마침 토마토도 있는데 어제 설명한 애니 얘기나 좀 더 해 주세요.” “아, <내일의 나쟈>? 줄거리는 그냥 평범해. 나쟈라는 발랄하고 귀여운 유랑극단의 무희가 있는데 사실은 귀족의 핏줄이지만 사정이 있어서 고아로 크는 바람에 온 유럽을 돌아다니며 엄마를 찾는 내용이지. 그런데 어쩌다 보니 영국 귀족인 프란시스라고, 착하고 성실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있는 힘껏 자선사업을 하는 참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지거든? 안소니 타입이랄까, 뭐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괜찮은 애야.” “음, 그런데요?” “그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정반대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쌍둥이 형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나쟈는 이 그라나다, 아니 알함브라에서 그 형을 동생인 프란시스로 알고 만나게 되지. 그때까지 나쟈는 키이스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동생인 프란시스인 줄 알고 따라다니고, 키이스는 키이스대로 정체를 밝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서 입을 내내 다물고 있었어. 나쟈는 이 남자, 분위기나 말하는 방식이 전과는 다른데 그걸 프란시스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한다고 여기면서 즐겁게 바라보면서 들떠서 따라다니지. 그러다가 갑자기 그 키이스가 ‘어울리지도 않게’ 주머니에서 탐스럽게 잘 익은 토마토를 꺼내서 하나 던져주고는 자기도, 정말이지 프란시스라고 생각하면 정말 안 어울리는 방식으로, 호쾌하게 토마토를 먹는 장면이 있어. 이렇게 한 손에 들고 쿨하게 한 입……?!?!?!?!?!?!”
허어어어억?!?!?!?!?!?!
잠깐, 내 입 안에 들어있는 게 뭐였더라? 분명 나는 토마토를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이건 토마토여야 하는데, 그런데 키이스가, 아니, 그게 아니라 토마토잖아. 토마토 아닌가? 토마토인데? 토마토 맞는데? 이게 토마토란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먹은 토마토들은 다 뭐였던 거지? 토마토가 아니라 토마토 비슷한 거?
“얘기하다 말고 뭐해요?” “어? 어? 어…그러니까…어…일단 잡아먹어!” “네?......헉? 뭐, 뭐, 뭐, 뭐, 뭐야, 이 맛은!!!” “살아있지? 이 토마토, 살아있는 거지?” “뭐야, 이거. 유기농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슈퍼마켓 토마토였잖아요.”
오 마이 가뜨, 살아가자 님, 그리고 헤니히 님…
알함브라에 갈 때 토마토를, 다른 곳에서 산 토마토를 싸 들고 올라가는 것에는 전혀 의미가 없어요. 꼭 이 동네에서 잘 익은 토마토를 사 들고 올라가서 먹어 줘야 하는 거였어요. 그러면 키이스가 귀족 주제에, 그렇게 험블하게 토마토를 먹는 이유를 마음 속 깊이,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어요.
여기 토마토, 그렇게 먹을 수밖에 없는 거였어!!!! >-<-0
우아하게 칼 댈 여유, 그런 거 있을 리 없어요!! 어쩌면 그 에피소드, 답사 차 갔던 연출자나 각본가가 토마토를 들고 올라갔다가 감동해서 그런 장면 끼워 넣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맛있어!!! 엄청!!!!
“이거 뭔가, 종자가 다른 걸까요?” “껍질은 얇고 부드러운데 속살은 엄청 찰지지 않아? 물기가 많아서 무른 것도 아니고, 적어서 딱딱하거나 빡빡하지도 않은 게 딱 적당해. 탄력 있고 쫄깃쫄깃한데다 뭘까, 이 알 수 없는 달달함은. 게다가 겨우 한 입 물었을 뿐인데 입 안 그득 전해져 오는 이 풍성한 태양…우와, 느껴지냐? 입안의 토마토가 막, 말을 건다.” “느껴져요. ‘나 맛있어? 나 맛있어?’하는데요?” “나한테는 ‘사랑해, 행복해, 랄랄라 즐거운 내 인생’으로 들려.” “누굴 사랑해요?” “누구든. 이 살갑게 내리쬐는 햇빛, 바람과 때때로 뿌리에 닿는 물기? 아무렇게나 자라도 구박받지 않는 자유분방함? 흔들림 없이 넓고 호의적인 대지?”
설마하니 ‘고작’ 토마토를 먹으면서 <신의 물방울>같은 만화에서나 나올플래쉬 백을 체험하게 될 줄이야. 비구름과 돌멩이가 나를 세상 끝까지 따라다닌다 해도 스페인 여행, 성공적으로 완수해주겠다고 결심했다(연관관계는 전혀 없지만). 내친 김에 오렌지도 까먹기로 했다.
“어머머머, 얘는 또 뭐래요?” “이건 뭐랄까…독일 오렌지가 스트레스를 잔뜩 받아 애써서 새콤 달콤한 맛을 쥐어짜내고 있는 ‘복잡한 환경에서 자란 고3 수험생’이라면, 이 스페인 오렌지는…” “오렌지는?” “한 번도 자신의 미래나 취업 걱정이라곤 안 해본 채 햇빛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10대 후반의 장난을 좋아하는 건강한 청년이야.” “와, 딱이야. 이해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거냐, 정말…OTL)
“하는 김에 조금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독일에서 먹던 오렌지는 라이벌 가문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은 와중에 애인도 없어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없이 신경증을 앓고 있지만 어쨌든 한 가닥 하는 캐퓰릿, 쥴리엣이 아니라 가슴이 답답한 티볼트.” “그럼 이건 뭐에요? 로미오는 아닌 것 같은데?” “이건 말이지,." "......?"
"<즐거운 머큐쇼>야.” “즈, 즐거운…머큐쇼…?” “그래, 머큐쇼. 머큐쇼 늘 즐겁잖아. 소심하고 센티멘탈한 친구가 침울해하고 있으면 손잡고 무도회에 데려가 주는 좋은 친구. 잊지 않고 친구의 가면까지 챙겨오는 세심함과 설령 적대가문이라도 노는 데는 자리를 개의치 않는 대범함에, 캐퓰릿 가의 유모라도 금방 말을 트고 노는 친화력, 화가 머리 끝까지 나더라도 친구가 그만 싸우라면 칼을 늦출 수 있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 사실은 사는데 별 생각 없는 녀석.” “그, 그게…즐거운 머큐쇼? 이해는 하는데 사소한 거 하나 지적해도 될까요?” “뭐?” “로미오랑 줄리엣, 결국 그 무도회에서 만나 죽는데요?” “무슨 소리야. 이 정도 마법의 토마토와 즐거운 오렌지라면 난 죽음도 불사할 수 있어. 그리고 걔들은 첫눈에 반해서 연애, 결혼, 파국까지 풀코스로 체험했으니 괜찮아. 어쨌거나 정말..." "......" "환상적이야.//_//'” “......그 말 할 줄 알았어요. 근데 정말 환상적이네요.”
“꽤 오래된 거 같은데 아직도 그라나다 쓰고 있단 말이에요?” “…그게 우리가 삽질을 좀 많이 했어야 다음으로 넘어가지.”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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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절세마녀 | 2006/12/16 02:18 | 중앙광장:방랑자의피리소리 | 트랙백 | 핑백(2)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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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것, 희귀한 것, 아름다운 것들이여, 오라!
by 절세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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