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일어나는 정신없는 테이블 토크. 주제는 음...잡다하네요. 어쨌거나 오늘도 여전히 실화 농도 99%를 자랑합니다. “이게 무슨 생과일주스도 아니고. 실화 농도 99%가 뭐에요?” “그래도 난 너처럼 강판과 거름망으로 만들지는 않아.” “솔직히 말해서 뭐가 달라요? 언니의 ‘해야 할 일’ 리스트에 이 만담 항목은 없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5) “미란다가, 미란다가, 미란다가!!” “뭘 어쨌길래 울면서 들어와?” “제가 말이죠. 인간적으로 우리도 부엌 좀 깨끗이 쓰자고 메모 남겨놨거든요.” “드디어 말한 거야?” “심하게 말한 것도 아니고 ‘먹고 나면 바로 닦는 정도의 센스를 갖는 게 어때?’ 라고 썼단 말이에요.” “근데?” “......가보니 미란다의 냄비가 하나 더 늘었어요.” “......닦지 않은 미란다의 냄비가 두 개. 끔찍한데.” “아,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요.” “왜인거야.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대체 어째서 그렇게까지 중국인인 거야.” “그런 소리 하면 화낼 걸요. 자긴 싱가폴 사람이라고.” “아니고 싶으면 좀 증명을 하든가.”
“그래서 오늘도 오렌지 쥬스를 만들어왔어요.” “밥하기 싫었구나. 강판에 갈아서 거름망에 거른 생과일 주스?” “아뇨, 오늘은 일자한테 믹서기 빌렸어요.” “빨리 끝나서 싫다며?” “어제는 특별이에요. 오렌지 쥬스에 팔 혼 따위, 이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요.” “하긴 피폐한 영혼을 팔아 봤자 쥬스 한 잔도 살 수 없겠지.” “근데 오늘 일자가 빌려주면서 한 마디 했어요.” “뭐라고?” “‘너, 요즘 계속 뭘 만든다?’” “묻기는. 전기 오븐에 빵틀까지 사서 남자 친구랑 사과 케이크를 만들려다가 3번이나 실패해서 몽땅 버리는 걸 나는 봤다고.” “역시 우리만 심심한 게 아니었던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드디어 할 일을 찾았어요. “뭔데?” “브라우니를 만들어요.” “......” “여기 초콜렛 싸고 좋은 거 많이 팔잖아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브라우니 싫어해요?” “아냐. 그냥, 분명 현재 상황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 뒤 나온 결론이라는 게 손에 잡힐 듯이 보여서, 우린 같은 수업을 듣고 있고 그래서 다음 주까지 보고서를 써내야한다는 사실 따위 상기시켜 제동을 걸어봤자, 어차피 내일이 되면 나도 옆에서 같이 만들고 있겠지, 까지 생각했어.” “......” “비슷한 표현으로는 ‘마지막 한 달 동안 제빵수련을 할 셈이냐.’같은 게 있지.” “......” “조금 다른 말로는 ‘이대로 내 이글루를 음식 블로그로 만들 생각이야?’ 라든가.” “하루 정도 브라우니를 만든다고 ‘세상의 끝’에 종말이 오지는 않아요.” “그거야 그렇겠지. 여긴 이미 끝이니까.”
“이따가 레시피를 찾아올게요.”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여러 개 뜰 텐데 그 중에 에스프레소 브라우니랑 백과사전 브라우니 빼고 초콜릿 많이 들어가는 걸로 몇 개 찍어서 적어오든가.” “맛없어요?” “그냥 내 취향이야. 지옥처럼 뜨겁고 죽을 만큼 단거.” “그건 커피를 위한 상용구잖아요.” “에스프레소니, 럼이니, 바나나, 아몬드, 헤즐넛 다 필요 없어. 한 입 물었을 때 ‘아, 이거슨 정말 위험한데 말임미다, 슨생님. 하지만 거부할 쑤 없었슴미다, 슨생님.’ 이라고 할 정도로 찐득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 상태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브라우니가 좋아. 뭐, 다른 게 먹고 싶다면 한쪽에 몰아서 넣으면 되고.” “대체 얼마나 만들어 본 거에요?” “레토르트 정복 사업을 펼치던 와중에 질릴 때마다 브라우니를 만들었거든.” “우리, 돌아가서도 친하게 지내요.” “어이.” “근데 그럼 검색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만들 때마다 다른 레시피를 보고 했더니 기억이 안 나.”
“그나저나 익숙한 냄새가 나는데 뭐죠?” “참기름과 감자를 듬뿍 넣은 <바지락 미역국>.” “와, 간만에 국이다.” “...에서 바지락이 빠졌어.” “그럼 그냥 미역국인 거잖아요.” “오늘따라 슈퍼마켓 가기가 귀찮더라고.” “이럴 수가. 목록에 없는 것부터 집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안 가버리다니.”
“하지만 맛을 보렴.” “헉, 뭐지. 바다의 시원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시원한데, 이번엔 뭘 넣었어요?” “후추를 미친 듯이 뿌렸어. 가슴 속 깊이 시원해지도록.” “아아, 명란젓 계란찜이랑 같이 먹고 싶은 맛이에요.” “그거 잘 어울리겠네.” “뭔가 바다가 너무 절실해 지는데요. 초고추장에 굴이랑...” “......” “열무김치...” “......이 이상 구할 수 없는 재료를 입에 올리면 국에서 미역을 빼 버리겠어.”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것만은.”
“의식주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셋 다 필수항목이잖아요. 요즘은 굳이 빼자면 ‘주’겠지만.” “그래? 먹는 거 의외로 중요한 문제였군.” “하루의 절반 이상을 식에 투자하고 있는 마당에 아닌 척 하긴. 그러는 언니는 셋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한데요?” “재미와 감동. 하나 더하면 사변의 쾌락.” “......” “좋게 말해 몽상, 바꿔 말해 망상.” “자기가 물어놓고 선택지에 없는 걸 말하면 어떡해요?” “진담인데. 특히 시각적 자극은 강도에 따라 식생활 중추를 마비시키지.” “금강산도 식후경?” “그 정도가 아니야. 그 왜, 개들은 후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갑자기 강한 냄새를 맡으면 반응을 멈춰버리잖아. 그거랑 비슷해. 어디서 보니까 멧돼지가 공격할 때는 냄새 나는 양말을 들이대면 된다던데, 같은 맥락일걸.” “......” “TV에서 봤어. 날 믿어. ‘열 받은 멧돼지를 상대할 땐 양말’.” “언니를 상대할 때는?” “어이.”
“히히,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사실 난 그렇게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었어.” “지금도 밥은 많이 안 먹어요. 디저트를 밥처럼 먹긴 하지만.” “그건 그냥 당분 공급 없이 이곳에서 맨 정신으로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고.” “알아요. 그러니까 서로 크림 뿌리는 걸 안 말리고 있죠.” “아무튼 하루의 메뉴 따위, 이런 식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결정하지 않았어. 미식가 기질이 있다고는 해도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먹는단 말야.” “에이, 거짓말.” “정말이야.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래두. 못 믿겠으면 내 지난 여름 2주간의 식단을 봐.
면류 일색이지만 불평 따위하지 않았어.” “그 아래 글씨는 뭐에요?” “동생이 쓴 거야. 하루에 ‘냉면-냉면-냉면’이나 ‘치킨-치킨-치킨’인 것만 아니면 메뉴 같은 거 보통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 정도까지 되면 좀 신경 써야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집은 대체적으로 그런데. 언젠가부터 일요일이면 모두 일광욕하는 물개처럼 거실에 누워 ‘어째서 인간은 하루에 세끼를 꼬박 꼬박 챙겨먹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먹지 않을 수 있는 만큼 버티다가...” “그러다가?” “서열이 낮은 쪽이 라면을 끓이기 시작해.” “누가 제일 낮아요?” “......나.” “동생 있다면서요.” “자기 것만 끓여. 그래서 어차피 내가 끓이러 가야 해.”
“라면의 마스터는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근데 다들 취향이 조금씩 달라. 나는 막 익기 시작한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고 아버지는 딱 맞게 익은 거, 어머니는 약간 불은 거.” “교묘하게 세분화되어 있는데, 동생은 어느 쪽이에요?” “남이 끓인 거면 뭐든.” “아, 그거 미묘하다.” “그래서 내가 끓이면 항상 아슬아슬하게 익을랑 말랑한 경계에 있고, 아버지는 딱 맞게. 어머니가 끓이면 아무도 안 먹지.” “자꾸 물어서 미안한데 동생이 끓이면요?” “몰라. 자기 것만 끓인다니까.”
“문어(文漁)라는 친구가 있어.” “언니 이름 한자 보고 사치품이라고 한 그 친구요?” “응, 대식가 집안에서 자란 식도락가 타입이라 항상 ‘넌 내 3분의 1만 먹고 어떻게 움직이는 거냐.’라고 분노했었어.” “오호.” “날더러 필요 이상으로 식탐이 부족하다며 나만 보면 뭔가 먹이려고 들었지.” “좋은 친구네요.” “식탐과 수면을 적극적인 오락으로 벗했어, 나 말고.” “친구 분을 키운 건 팔 할이 식탐이라거나?” “한번은 식구 4명이 고깃집에 가서 3인분을 먹고 미안해서 국수를 시켜 맛만 보고 나온다는 우리 집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서 ‘엄마, 우리도 한 번 해볼까?’ 했었다지.” “그래서요?” “오빠 없이 부모님이랑 3명이 가서, 4인분을 해치우고 밥을 비빈 뒤 국수까지 먹고 나왔다더군. 아무튼 세상에 밥을 그렇게 즐겁게 먹을 수가 없었는데. 하지만 2프로 부족한 게 있었지.” “뭔데요?” “절대미감.” “아깝다, 질보다 양인 거구나.”
“그래서 가끔 내가 밥을 해주면 화를 냈어.” “어, 왜요?” “맛있는데 왜 안 해 먹냐고. 나의 식신이 받고 있는 대우는 부당하기 그지없다며 그렇게 학대할 거면 내놓으라더군. 하는 말이 흡사 음식계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같았지.” “싫다고 했죠?” “당연하지, 내 장난감이라고. 어쨌든 심지어 그 친구가 나를 위해 써줄 뻔한 이야기도 있었어. 엄밀히 따지면 나에게 쓰라고 종용한 거지만.” “어떤 건데요?” “그냥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천재와 범재의 이야기야.” “해주세요. 우리에게 있는 건 시간밖에 없잖아요?” “별 얘기 아닌데. 그래도 듣고 싶으면 내일 다시 보자고.”
<시간 나면 내일 들고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근데 그거 끝까지 다 안 썼는데 어쩌자고 이러는 거죠.OTL>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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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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