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발신 중인 99% 실화 요리 토크. 오늘의 주제는 ‘슈퍼마켓 장보기’. 어제 하려던 이야기는 정리를 위해 잠시 기억의 미궁 속으로. “그냥 하는 소리겠지만 어떤 사람이 이거 계속 하래.” “......” “...영원히.” “곤란해요. 언니는 그렇다 치고 전 여기 계속 안 있을 건데요.” “저 엄청난 저주에서 나만 두고 빠져 나갈 수 있을 거 같아?”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6) “안 되겠어.” “뭐가요?” “오늘도 슈퍼마켓을 안 가고 버티려고 했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지금 있는 재료로는 만들 수 있는 게 없어.” “어, 그래도 뭔가 꽤 있는 거 아니었어요?” “있긴 해. 소고기 없는 감자 미역국, 치즈가 빠진 감자 피자, 감자 콩 스프, 감자튀김, 감자전, 감자 오븐 구이, 삶은 감자 같은 거.” “결국 감자밖에 없다는 소리잖아요.” “귀찮아. 왜 한 시간에 두 대 오는 버스를 기다려서 고작 슈퍼마켓에 가야하는 거야?” “그냥 가요. 어차피 오늘 안 가면 주말에 마켓 열지도 않는데.”
“음, 그럼 피클부터..” “아, 초코 무스다, 무스 사자.” “그렇게 서슴없이 목록에 없는 물건부터 집지 좀 말아요.” “안 먹을 거야?” “먹을 거지만.” “자, 그리고 커버춰 초콜렛.” “브라우니 안 만든담서요.” “그런 말 한 적 없어.” “......왜 화가 났어요?”
“내 여행용 트롤리를 장바구니로 전락시키다니. 이 도시, 정말 여러 가지로 용서할 수가 없어.” “차가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어떨 땐 나보다 가방의 효용 가치가 더 큰 거 같아.” “......” “이 가방만도 못한 인ㅅ...” “스톱. 아직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했어요.”
“굴 소스 볶음밥 할 수 있댔죠?” “굴 소스랑 새우랑 피망, 옥수수 집어 와.” “여기요. 스파게티 면 남아 있죠?” “토마토소스랑 햄이랑 모짜렐라.” “삼겹살도 괜찮지 않을까요?” “양상추, 양파, 양송이, 마늘.” “허브 닭다리 구이는 어때요?” “거부하겠어.” “왜요?” “닭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주말에 대체 내게 몇 가지나 만들게 할 셈이야?” “......” “......” “......과일 볶음밥은?” “아, 그거 재밌겠다. 파인애플 통조림이랑 사과로 어떻게 안 될까?” “해보면 되죠, 뭐.”
“닭은 왜 안 좋아하세요?” “먹으면 군소리 없이 먹는데 왠지 질렸어.” “여기서 닭 먹은 적 없잖아요.” “동기들하고 모여서 저녁 식사 하면 왠지 늘 닭집에 가.” “......” “닭튀김, 찜닭, 불닭, 삼계탕, 닭도리탕, 닭강정, 닭갈비...”
“우린 주로 일식집 가는데. 비싼데 말고 왜, 있잖아요.” “나도 그게 좋은데 동기 중에 포항 출신인 애가 바다에서 나는 걸 하나도 못 먹어.” “포항 출신인데?” “친척 중엔 양식장 하는 분도 있을 걸. 내가 친구들과 얼마나 알탕이 먹고 싶었는지 넌 모를 거야.” “어째서, 왜...포항인데.” “비린내 난대. 미역도 안 먹어. 바다에서 나는 건 김밖에 안 먹지.” “......” “정말이야. 걔네 집에 한번 놀러갔었는데 아주머니가 간만에 회 좋아하는 딸 친구 왔다고 박스에 회를 꾹꾹 눌러 담아 오셨어. 그런데 거짓말 안 하고 내 친구, 친구 동생, 그 친구 언니, 그리고 아주머니까지 아무도 회를 안 먹더군.” “아니, 그런 아까운.” “그리고 모두 날 매우 신기한 듯 쳐다봤었지. 남길 수도 없고 해서 필사적으로 먹었는데도 남길래 나중에는 회로 쌈을 싸 먹었어.”
“몇 번 버스더라?” “아까 14번 타고 왔잖아요. 1번하고 14번 밖에 없는데 뭘 맨날 까먹어요?” “몇 분에 와?” “12분, 42분요. 슈퍼마켓 처음 와요?” “내 행동반경을 구속하는 버스 시간 따위.” “......<닥터 후>에 나오는 실리딘이 어느 별 출신이에요?” “락사코리코팔라패트리어스.” “지난 시즌 1화에 나오는 플라스틱 괴물 이름은요?” “네스틴컨셔스니스. 셰도우 선언 15번 조항에 명시된 평화 유지에 대한 약정에 따라 대화를 요청하면 반죽 같은 얼굴을 만나볼 수 있지.” “애정이 없으면 그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거군요.” “모든 걸 기억하고 살 수는 없잖아.”
“근데 버스...왜 안 와?” “오겠죠.” “끊긴 거 아냐?” “에이, 아직 8신데.” “여기 보니까 8시에는 19분이 막찬데?” “지금 몇 신데요?” “19분.” “1, 2 분 정도는 늦을 수도 있어요.” “혹시 지나간 거면 이 가방 들고 그대로 이 도시를 떠나버리는 수가 있어.” “기차역까지는 어떻게 갈 건데요?” “......쳇.”
“양배추...양배추...” “......” “아아, 춥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 “양배추...양배추 당근 마요네즈 샐러드...데친 양배추 쌈...” “......” “양배추 돼지고기찜...양배추...흠, 양배추로 또 뭐 할 수 있지?” “양배추 안 샀잖아요.” “......” “......” “...바지락...바지락바지락...바둥바둥...바지락.” “......” “바지락 칼국수...조개국...해물 스파게티...크램 쵸더...바지락 아욱 된장 찌개...” “기껏 장 봐놓고 그 중에 없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구상하는 이유가 뭐에요?”
“양배추가 크고 싸고 좋아 보이는 게 있었는데 안 집었어.” “왜요?” “양배추 안 좋아하거든.” “그럼 고민하지 말아요.” “샐러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타협하는 중이야.” “그럴 시간에 사 오겠다.” “미묘해. 움직였다간 차가 올 것 같아.”
“어......” “......” “......” “지금 이거 눈 오는 거냐?” “독일에서 눈 오는 거 처음 봐요.” “왜 이제 와서 겨울인 척 하고 그래. 안 오고 잘 버티더니.” “미란다 신났겠네.” “미란다가 왜?” “자기 나라에 눈 안 온다고 이런 싸락눈 내려도 괜히 부엌 창가에 기대서 분위기 잡아요.” “그럼 오늘은 냄비 치우겠네. 미란다의 냄비 옆에 있으면 분위기 안 나잖아.” “사실은 아까 치우고 역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버렸어요.”
“자, 이제 뭐부터 하면 될까요?” “야채 씻고 고기를 굽자. 거기 양상추 썰고 당근 좀 찢어줄래?” “......배고파요? 당근 벌써 자기가 갈고 있으면서.” “아, 조금. 고기를 썰고 양상추 찢으라는 소리였어.” “배고프다면서 샐러드에 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요?” “보통 때라면 들어오자마자 고기부터 굽고 밥을 푼 다음, 일단 그걸 먹으면서 국을 데우고, 샐러드는 잊어버렸겠지.” “근데?” “이건 내가 인간이고자 하는 마지막 발버둥이야.” “무슨 소리에요?”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고 싶다고. 다른 곳이라면 어떻게 먹든 별 문제없지만 이 동네에서는 오직 요리가 내 최후의 보루란 말이야.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너무 많이 봐서 더 이상 볼 게 없는 노트북을 들고 윈도우즈 미디어 플레이어를 켠 다음 음악 파일이 아니라 시각화를 랜덤으로 돌리면서 감상이나 할 것 같다고.” “배고파서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거 벌써 어제 해 봤어요.” “......”
“자, 샐러드. 양상추에 채 썬 당근이랑 데친 브로콜리와 모짜렐라.” “오호, 무슨 소스에요?” “플레인 요구르트에 레몬즙이랑 꿀을 넣고 소금과 후추 약간.” “요구르트 종류가 이렇게 많은 나라에 와서 종류와는 상관없는 플레인 요구르트로 만든 건데, 여기 와서 먹어 본 요구르트 샐러드 중에 제일 맛있어요.” “지난번에 새로운 걸 시도한다고 넣었던 체리 요구르트가 조금 아니긴 했지.” “게다가 이 브로콜리 상태, 너무 완벽해.” “생각해보면 이태리 갔다 오기 전까지는 보통 이런 건전한 식생활을 유지했던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샐러드 양이 메인과 비등했죠. 디저트가 아니라.”
“오늘 눈이 오는걸 보고 비로소 왜 당분 섭취가 급격하게 늘었는지 알았어.” “왜 그런데요?” “전에는 ‘조금 있으면 이태리에 간다’는 희망으로 살았거든.” “......” “돌아오니 이곳을 너무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이태리도 아닌 주제에 나를 괴롭혀. 이태리도 아닌 주제에 나를 귀찮게 해. 이태리도 아닌 주제에 기차는 갈아타야하고 가끔 연착도 하지. 덩달아 집과 전산실이 말썽을 일으키고, 심지어 슈퍼마켓 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두 대라고.” “근데 그거 알아요?” “뭘?” “이태리에서 만난 유학생들, 독일에 있는 우리를 부러워했다는 거.” “냉정하게 따지면 여러 방면에서 산업적으로 이태리가 독일 따라오려면 한참 걸리는 거 맞긴 해. 근데 상식적인 차원에서, 여기 있는 거랑 이태리 요리 아카데미에서 요리사 수련하는 것 중에 고르라면 어느 걸 고를래?” “요리사 수련생의 친구가 돼서 빌붙겠어요.” “......어이.”
“자, 이제 이야기 해주세요.” “뭘?” “어제 무슨 이야기 해 준담서요.” “까먹고 있었다.” “......” “이해해. 배고팠어.” “알았어요.” “밀크티 끓여 와서 계속 할까?” “차에 우유 탄 게 밀크티 아니에요?” “좀 다른 거. 아니, 사실 별로 다르진 않지만.”
<밀크티 마시면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 ...될 지도 모르고 아닐 지도 모르지 말입니다.> 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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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것, 희귀한 것, 아름다운 것들이여, 오라!
by 절세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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