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7)
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계속되는 99% 실화(진짜) 키친 토크. 오늘의 주제는 '밀크티와 브라우니'. 한 번 미뤄진 이야기는 습관처럼 계속 쭈욱 밀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거 진짜 실화냐는데?”
“아니면 대체 이런 영양가 없는 음식만 잔뜩 나오는 이야기를 왜 쓰겠어요.”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내 이름이 하이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라.”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7)



"......"
"왜, 맛없어?"
"내일부터 매일 아침 수련하러 오겠습니다."
"이, 이런 거 수련하지 마. 엉터리라고. 짜이를 마시고 싶었는데 생강가루가 없어서 귀찮은 나머지 우유와 설탕, 찻잎, 계피가루를 한꺼번에 넣고 끓인 거란 말이야."
"맛있어요. 특히 이 한번 끓어올랐다가 꺼지면서 생긴 우유 거품이 사르르..."
"얼그레이가 좀 맛있긴 하지."
"한국에 돌아가도 끓여버리겠어요. 찻 잎 비싸겠지만 끓여버리겠어. 울면서 끓여버리겠다고요."
"끓여, 안 말려."
"근데 왜 갑자기 밀크티에요?"
"추우니까 생각이 나더라고. 따끈해진 머그 잔을 양손에 든 채 창밖을 바라보며 이 달콤하고도 이국적인 계피 향기를 맡으면서..."
"오오."
"밖에서 1cm도 안 쌓인 눈에 마냥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있는 녀석들을 발견하고는 훗, 하고 웃어주는 거지."
"......"



“재료는 다 사 놨고...레시피 가져왔어?”
“여기요. 초콜렛 200g, 밀가루 75g, 계란 2개, 우유 80ml, 설탕 90g, 버터 100g, 베이킹 파우더 조금.”
“음, 2배수로 만들 건데 집에 저울 있지?”
“당연히 없죠.”
“그럼 일자는 뭘로 파이 만든 건데?”
“몰라요. 파이 믹스 사다가 하지 않았을까요?”
“그랬던 거야? 그럼 이거 어떻게 만들자고?”
“......”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야.”


“언니의 감을 믿겠어요.”
“어이.”
“식신의 기분이 최고조인 이 때.”
“......지금 날더러 손으로 밀가루와 버터, 설탕의 양을 재라는 거지?”
“네.”
"진심이냐. 너의 냉철한 이성은 어디로 간 거야."
"이해해 주세요. 미란다의 냄비가 아침에 부활했어요."
“......알았어. 대충 만들어도 되는 브라우니라서 다행이군. 순서는?”
“귀찮아서 안 적어왔는데요.”
“......”
“많이 해봤대매요.”
“마음의 안정을 위해 참고용으로 적어오지 않을까하고 기대했었지.”


"......"
"......"
"......"
"......어때요. 밀가루 한 숟갈 더 올릴까요?"
"아냐. 두 스푼이 좋겠어."
"솔직히 말해봐요. 한 스푼 차이가 느껴져요?"
"쉿, 정신 집중 중이야."
"우유가 160ml인건 계량컵이니까 확실한데 말이죠, 그거 그릇 무게도 감안 하셔야 할걸요."
"그 정도는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어."


“순서는 뭐, 비슷한 거끼리 섞으면 되는 걸 테니까 일단 초콜렛을 녹이고.”
“거기에 실온에서 빈둥거린 버터랑 설탕을 넣자. 어, 바닐라향이 있다.”
과연 4차원의 찬장. 전에 살던 사람들은 여기 얼마나 있었던 거에요?”
“몰라, 한 1년 정도?”
“그 정도 살면서 빵 한번 안 굽기에는 심심하기도 했겠네요. 베이킹파우더랑 밀가루, 체에 쳐 둘게요. 우유도 끓이고...”
“그걸 초콜렛 믹스랑 섞은 다음에 조금 식혔다가 달걀 섞고, 밀가루 넣으면 대충 될 거야.”
“왜 식혀요?”
“익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달걀들이 좀 예민한 구석이 있지.”
“......”
“그 왜, 험프티 덤프티처럼.”



“찬바람이~따스하게~두뺨을~스치면~, 훗훗훗”
“싸늘하던~야채호빵~몹시도~그리웁구나~, 후후후후후”
“이 냄새 봐. 눈만 감고 있으면 지상 낙원이 따로 없어.”
“그거 알아요? 방금 나갔다 왔는데 온 빌딩에 초콜렛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어요.”
“저런, 시험 때문에 발이 묶인 가련한 영혼들이여.”
“오오, 웬일로 동정표를?”
“자, 어서 먹고 싶어 해 봐. 벽을 긁어 보라고. 지금이라면 발을 굴러도 용서해 주겠어.”
“......전엔 저한테 같은 방 쓰는 애들 고문한다더니.”
“자정의 초콜렛 냄새는 고문이지. 아침엔 그냥 애교잖아.”



“아, 멋진 반죽이다.”
“그러게요.”
“빵틀.”
“어, 없는데. 있는 거 아니었어요?”
“뭐라고? 일자의 빵틀이 있을 거 아냐.”
“부엌에 안 보이는 걸 보면 방 안에 넣어놨거나 남자 친구 집에서 가져 온 걸지도 몰라요.”
“그럼 지금 이거 어떻게 굽자고.”
“......”
“......”
“이, 일자의 그라탕 그릇이라도......”
“고마워, 일자. 오븐 빌려줬으니 더 이상 불평 안 할게.”


“급조한 빵틀인데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 수 있는 거지.”
“뭐가요?”
“반죽이 딱 반으로 나눠져. 환상적이야.”
“오호, 반은 언니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하면 되겠네요.”
“나머지 반은 네가 넣고 싶은 걸 다 넣어. 바나나랑...아몬드가 있군. 아몬드 볶아줄게.”
“고마워요.”
“근데 이거 너무 크지 않아? 작은 게 낫지 않나?”
“그게 좋겠죠. 그럼 칼이 어디...그 나무 방망이는 뭐에요?”
형상을 보아하니 마늘 빻을 때 쓰는 원시적인 도구 같아.”
“......”
“서랍 안에 있었어. 여기가 워낙 4차원이잖아.”
“......내 아몬드를...내 크고 아름다운 아몬드를...방망이로...”
“세상의 모든 물건이 1차적인 용도만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냐. 필요는 꼼수의 어머니지. 네스까페 무스 통처럼.”




“......”
“......”
“슈, 슈가파우더를 뿌려주겠어.”
“저, 저는 코코아 가루요.”

오, 오래간만에 눈 덮인 창밖을 내다보며 먹어 줄까?”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
“......”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히히히히히...흐흐히히히히히히히”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요?”
“기념 연설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맛인데...”
“뭐라고요?”
“......아아아, 제군들.”
“저 혼자긴 하지만 일단, 네.”
그대들은 이 아침의 영광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은 위대한, 위대한 승리의 날이다.”
“오오, 과연 테이스트 오브 빅토리.”
“매서운 겨울과 한결같은 추위도 우리를 정복하지 못했다. 달렉들처럼 세상의 끝으로 떨어졌지만 우린 살아남았어.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뭣하지만?”
“이렇게 대충 대충 만들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브라우니 처음 먹어 봐. 대체 왜 난 이걸 손으로 잰 거야. 다신 못 만들 거 아냐.”


“하지만 진짜 승리는 뭔 줄 알아요, 언니?”
“뭔데?”
“아직 뒤에 저만큼이나 남아있다는 거죠.”
"응, 그래. 네가 맞아."







갑자기 네이버가 안 열리고, 다움이 안 열리고, 핫 메일이 안 열리고, 프리챌이 안 열려도, 그래서 메일을 제목까지만 보고 튕겨도 어제의 승리는 기억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이시간에 계속>




닫기

by 절세마녀 | 2007/01/29 23:52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17)
트랙백 주소 : http://ladywitch.egloos.com/tb/149980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알테마 at 2007/01/29 23:57
...위대하시빈다, 마님. 저에게 밀크티 끓이는 법을 전수해주세요!!!(핀트 어긋남) 저 브라우니 왜 저리 먹음직스러워 보이죠... 단 거 땡기는 김에 사정없이 브라우니가 먹고 싶어져라ㅇ<-< 왜 밤에 이 포스팅을 눌러서 염장질을 당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요, 어흐흐흐흑.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7/01/30 00:01
정확히 그게 이 시간에 포스팅 하는 이유입니다. 훗
Commented by 나무벌레 at 2007/01/30 00:04
.......이번주에. 그 세상의 끝 찾아가도 될까요? 한조각만 남겨주신다 약속해 주시면 내일이라도 당장 기차 타고 달려갈 수 있어요. 수업이 걸리기는 하지만 에이 그까짓거...(...클래스메이트에게 한 대 맞고 끌려나간다)
Commented by 에이미 at 2007/01/30 00:30
그냥 계피가루 넣고 끓여도 되는 거였군요. 문제는 집에 홍차잎이 없다는게;; 립톤이라도 사와야겠네요. 그나저나 초콜릿이 잔뜩 들어간 브라우니 먹고싶어요. 흑흑...
Commented by 비류연 at 2007/01/30 00:42
아아...음식만담을 보면
저기가 '세상의 끝'이고 '죄악 깊은 도시'에 인터넷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동네란 걸 무릅쓰고 가고 싶어집니다(...)
Commented by 카시아파 at 2007/01/30 00:53
아~~~!!!!!!!! 필요는 꼼수의 어머니!!!!!!!

존경합니다. OTL
Commented by 동굴아저씨 at 2007/01/30 01:04
우하하하!!!
뭐...음식은 손맛이라는 거겠죠.음...
그건 그렇고...미란다...무서운 여자!!
Commented by 정모씨 at 2007/01/30 02:55
저도 밀크티 끓이는 방법이 매우 탐납니다-
브라우니도 탐나지만 손으로 재셨다니, 손을 보내주세요! 라거나 사진을 찍어 올리세요! 라고 할수도 없고...^^;;
Commented by esatto at 2007/01/30 09:05
부러워할까보냐!! 부러워하지 않을거예요!! 전혀!! 않을거라구요오오오오오오오....(멀어진다)
Commented by 키르난 at 2007/01/30 09:59
아침(이라기엔 늦었지만)에 피실피실 웃음을 흘리며 보고 있었습니다. 밀크티 한 잔 마시러 가야겠군요. 못참겠습니다.-ㅠ-
Commented by Vampire at 2007/01/30 10:10
일생에 한번 밖에 먹을 수 없는 '브라우니'로군요..
Commented by 少雪緣 at 2007/01/30 11:14
흐음... 일생 일대의 장렬한 맛이군요...식신이 최고조가 되는 날을 다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Commented by 사스콰치 at 2007/01/30 15:58
이오공감에서 보고 눈팅만 쭈욱 하다....그렇습니다. 며칠 계속 이전글을 스토킹 했습니다....죄송합니다 ;ㅅ;
덧글 남깁니다. 사실은 링크도 했어요 ;ㅅ; 글이 정말 맛깔납니다.
숨어서 거친 숨을 내쉬는 것 보다 맑은 공기 마시면서 읽겠노라 신고합니다. ;ㅅ;
Commented by ★花夜★ at 2007/01/30 20:15
아아 볼때마다 감질납니다...사실 저도 스토킹 중이에요..
언제 올라올지 맨날 기웃기웃///
말투가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근데 누군가 실화냐고 물어봤다는 말에 뜨끔합니다//
브라우니 먹고 싶어요...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7/01/31 01:56
OTL I cannot write Korean. Hkhk let me reply some other time. Thank you for everyone.
Commented by 얼음나비 at 2007/01/31 10:44
와- 재밌게 읽었어요 ^^
눈 대중의 승리인 건가요.
전 버터 쿠키를 구워본 적이 있는대 계량을 했음에도 실패. OTL
포스트 보고 있으니까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요. 뉴_뉴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7/02/01 02:29
얼음나비님// 우훗 우훗, ㅠㅠㅜㅠ 그 소리야말로 인터넷 안 되는 제 마음속에 한가닥 단비같은 ...농담이고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당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rss

skin by 이글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