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끊길 듯 말듯 이어지는 식사 통신. 오늘의 주제는......만담에 주제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버린 저. “탈출한다더니 어떻게 된 거에요?” “......늦잠 잤어. 내일 할 거야.”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0) “전부터 궁금했는데..." "응?"
"그걸로 몇 가지나 할 수 있어요?” “공식적인 용도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거지.” “그런 거 말고 언니가 할 수 있는 거요.” “글쎄, 껍질이 있는 거라면 야자 빼고 뭐든 벗길 수 있어. 당근, 브로콜리, 양파, 오이, 소스용 토마토 기타 등등.” “그래도 보통 사과를 깎지는 않지 않아요?” “......” “......” “편해.” “......” “미적 가치보다 식욕이 우선시 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오렌지도 깔 수 있어. 보여줄까?” “아니, 괜찮아요.”
“당근에 칼집 내 놓고 밀면 채썰기도 할 수 있지.” “오호.” “여행 다니다가 여차하면 비닐 포장 뜯을 때도 쓸 수 있고, 그물망도 끊을 수 있어.” “거의 스위스 칼이네요.” “그것보다 훨씬 가벼워. 병을 따거나 손톱을 깎을 수는 없지만 내 취향이야.” “그래서 유일하게 집에서 가져온 주방용구가 그거에요? 젓가락도 빼먹고 왔으면서?” “......버스 안 같이 좁은 공간에서 과일 깎아 먹는 데는 최고라니까.”
“...그냥 인생 전체가 여행이죠?” “어떻게 알았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수건이 스포츠 타월인거 보고 눈치 챘어요.” “My two favorites. 가볍고 유용하거든.” “......옷장 안에 겹칠 수 없는 챙 모자 두개랑 치마폭 엄청 넓은 드레스 있는 거 알고 있는데요.” “그거랑은 다른 문제야. 뭐랄까, 일종의...” “......” “디저트라고.” “메인 디쉬의 위치를 위협하는 디저트요?” “그래, 그런 거.”
“어쨌든 적어도 그 칼보다는 마음에 들어. ‘doesn't harm, doesn't kill, doesn't wound.’” “그게 무슨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에요?” “소닉...소닉 감자칼이라고 할까, 그럼?” “하여간 이 칼은 정말 안 들어요. 양송이밖에 못 자르겠다니까요.” “먼저 살던 사람들이 쓰다가 버린 걸 그 다음 애들까지 쓰다가 놓고 간 거니까. 칼날 가는데다 아무리 갈아 봐도 회생이 안 되더군.” “이 집엔 칼날 가는 게 다 있어요?” “응.” “과연 축복받은 찬장. 양송이 전용 칼에 칼날 없는 강판, 아몬드를 부수는 마늘 빻개, 아무도 쓰지 않는 밀가루 밀대와, 들지 않는 칼날 갈개까지.” “굉장하지 않아?" "뭐가요?" "이렇게까지 대충 다 갖춰져 있는데, 이렇게까지 쓸모없기도 쉽지 않지.” “그러고 보니 새 걸 사기도 미묘하게 있을 건 다 있네요.”
“훗, 우리에겐 칼도 없고.” “냄비도 없고!” “잘 드는 채칼도 없어요!” “그래, 하지만 그래서 너희가 이 닥터우리를 무서워하잖아.” “빵틀도 없고, 오븐도 없고.” “심지어 저울도 없는데 브라우니를 만들었지!” “못 할 줄 알았지? 다 한다구.”
“봐. 가진 건 접시와 와인뿐이지만 깔보나라 스파게티를 해냈다고.” “오오, 훌륭해요. 피렌체에서 마셨던 끼안티네요?” “응,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스파게티에 생모짜렐라를 올려봤어.” “오, 근데 왜요?” “뭘 알려고 그래. 그냥 먹지.”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파르마산 치즈가 없었어.” “알았어요. 안 물어볼게요.”
“미묘하군.” “뭐가요, 맛있기만 한데.” “맛있긴 한데 미묘해. 왠지 100%가 아냐.” “......음?” “이거 좀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올리브 기름에 볶은 양파, 새우, 브로콜리, 뉘른베르크 소세지, 양송이, 치즈...후추까지 뿌렸으니 빠진 거 별로 없는데요, 오늘은?” “왜지, 왜 100%가 아니지?” “그냥 드세요. 맛있는데.”
“아.” “알아냈어요?” “근데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뭐가 빠졌는데요?” "......" "......" “하몽.” “......” “굽지 않았을 때는 얇은 살이 혀에 착 감겨들고, 구우면 베이컨 따위가 따라올 수 없는 깊은 향을 내는 그거.” “......” “그걸 잘게 잘라서 면이랑 소스에 넣고 냄새가 배도록 볶으면 정말 죽여주는 맛이 나ㅇ...” “......스페인 가버리겠어요.” “그, 그럴래?” “일단 이건 먹고요.”
“지금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 “아까의 조리 과정을 마음의 눈으로 재생해서 하몽을 넣고, 마음의 혀로 맛봐주겠어.” “......가능한 거에요?” “눈에는 사실 자동 편집기능이 있어. 관심 없는 대상은 제대로 보지 않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임의 삭제 및 수정이 가능한데 삽입은 안 될까봐? 이른바...” “......” “‘감각의 재현’을 이용하면 가능해.” “어디서 들어본 건데.” “......<유리가면>.” “아, ‘두 사람의 왕녀’죠? 오리겔드와 알디스가 나오는 거.” “응.”
“스페인 간다고 하니까 말인데...” “아직 안 가요.” “아무튼 뮤지컬 생각을 하면 런던에 한번 쯤 갔다 오고 싶기는 해.” “가세요, 그럼.” “근데 가서 밥 먹을 생각을 하면 전혀 가고 싶지 않아져.” “저도 마찬가지에요.” “애프터 눈 티세트라든가, 티포트라든가, 얼 그레이에 방금 구운 스콘이라든가, 닥터 DVD라든가 생각하면 가고 싶어.” “그렇게 탐나는 게 많은데 왜 안 가요?” “하지만 맛없다고.” “하긴, 같은 재료로 그렇게까지 맛없게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의외로 중요한가 봐, 음식. 전에는 왜 내가 그렇게까지 마음 속 깊이 영국을 거부하고 있는지 몰랐어.” “언니가 너무 안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에요. 먹지도 못하는 그림만 방에 잔뜩 쌓아두면 뭐해요.” “내 마음의 양식이야.” “몸의 양식은요?”
“......” “......” “그러고 보니 <닥터 후>, 카디프에서 이번 시즌 촬영 중이래.” “화제를 돌리지 마세요.” “카디프, 런던에서 버스로 3시간이래.” "......" "......" “......가, 갈까요?” “가고 싶지?” “네.” “나도. 근데 그 얘길 듣고도 마음이 갈등하더라니까. 맛없어, 맛없어, 하지만 눈과 귀가 즐거운데, 그런데 맛없어, 라고.” “새, 생각해보도록 해요, 우리.” “그래.”
음...중간에 저건...<닥터 후>2005년 시즌에 그런 대사가 있어요
"하지만 넌 무기도 없고, 전함도 없고, 작전도 없다!" "그래, 그래서 너희가 이 닥터를 무서워하잖아."
주위에 아무 것도 없는데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사용하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대사랄까, 그런겁니다.
<내일은 진짜 탈출입니다. 즐거운 주말~>닫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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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것, 희귀한 것, 아름다운 것들이여, 오라!
by 절세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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