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돌아온 여독이 안 풀립니다. 졸려요. 졸려요. 이렇게 잤는데도 졸려요. 허리도 아프고 배도 아파요. 우잇씽. 그래도 이어지는 토크토크, 오늘의 주제는 쟁반 노래방. "오늘은 왜 늦었어요?" "다 썼는데 화면이 굳어서 싹 날렸어."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2)
"......" "......" "징한 놈." "벨기에 가서 홍합 사온 건 어디의 누군데요?" "아무리 그래도 길거리에서 파는 깔쪼네까지 싸서 들고 올 줄이야." "떠날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독일 음식 별로 먹고 싶지 않잖아요?" "......훌륭해. 잘 사왔어."
"Chianti도 사왔네?" "전에 같이 여행갔을 때를 떠올리며 한 병 집었어요." "좋아, 좋아. 훌륭해."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도 파티해요." "늘 하고 있는 파티긴 하지만 그러도록 하지." "그리고 오늘에야말로!!" "응?"
"'세일러문'을 완성시키는 거에요!!"
"......" "저번에 돌아올 때 기차 안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후로 기차만 타면 머리 속에서 내내 맴돈단 말이에요." "세상에는 검색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잖니?" "언니도 아시잖아요. 여유있게 만화주제가를 검색하기엔 학교 회선이 우리를 거부한다는 걸." "그건 그래."
"그래서, 어디까지 했더라. 멜로디는 너무 선명한데 영 가사가..." "앞부분부터 막혔어요. 한소절 건너 뛰고, 지금 이순간이 꿈이라면." "OOO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 할텐데." "또 한소절 건너 뛰고, 자꾸만 설레이는 내 마음." "동화속 마법의 세계로 손짓하는 저 달빛." "아아~,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아아? 다른 단어 아니었어? 일단 체크." "꿈결 같은 우리의 사랑." "이 다음도 생각 안나. 뭔가 여러 사람 복작복작한 데에서 당신을 만난건 우연이 아니네 어쩌구 했던 내용 같은데." "그리고 마지막이 무적의 세일러문."
"무적?" "보통 이런 만화 주인공들은 적이 얼마나 세든 무적 아니에요?" "당신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닌데, 그게 무적이야?" "어떤 의미에서는 충분히 무적이에요." "미저리도 아니고." "그럼 뭘까요. 사랑? 정의?" "아냐, 'O적'이야." "흠..." "아, 그럼 그거겠네." "뭔데요?" "기적." "아하, 하나 클리어했다."
"구멍이 하도 많이 뚫려있어서 어디서부터 수습해야할지 감도 안 잡혀." "앞에서부터 할까요?" "분위기는 확실하게 떠오르는데 말야. 그 당시 주제가 치고 애들 만화 같지 않은 묘한 구석이 있었지." "맞아요. 보기드문 단조에 뭔가 밤 이미지가 많아서..." "뽕짝." "...에?" "처음 듣고 '이게 왠 뽕짝?'했었어." "......" "뭐, 나한테는."
"아무튼 처음 시작할 때 의미가 약간 그런 거였는데. 뒷부분 가사가 '이게 꿈이라면 고백할텐데'니까 앞은 그거 아닐까?" "어떤 거요?" "'내가 원체 춈 소심해서놔서 말이지', 이런 거." "......" "비슷할 걸." "어렴풋이 기억 났어요." "오오, 뭔데?"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자, 그럼 다음으로..." "왜 미안해?" "모르죠, 그런데 입에 붙은 말인걸 보니 이게 맞는거 같아요." "...왜 미안해? 고백 못했다고 미안할 필요가 어딨어. 속 상하는 건 자긴데." "따지지 말아요."
"그럼 다음은 OOO 너에게로 다가가, 부분인데." "뭘까, 조금씩?" "음...좀 다른 느낌 아니에요?" "하긴 그래. 지가 무슨 어린왕자 꾀는 여우도 아니고 뭘 조금씩 다가가." "그전에 여우가 어린 왕자를 꾄 것도 아니고 말이죠." "입 모양이 좀더 벌어져야 하는데 뭐지." "혹시 이거 아닐까요? '살며시'" "오호, 그거 맞는거 같아. 적당히 하고 패스"
"이번엔 한소절 뭉텅 빠졌네요." "이것도 내용은 기억나." "어떤 건데요?" "밤이 깊어서 할 일은 없고, 전화는 하고 싶은데 너무 늦어서 못 하겠고, 그래서 외롭고 쓸쓸하다는 분위기였지." "......고작 한 소절인데 무슨." "진짜야. 그래서 애들 같지 않은 내용이다!! 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었어. 연애 아니면 불륜 뿐인 금요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잖아." "......" "......" "아, 전화도 할 수 없는 밤이 오면." "훌륭해, 훌륭해."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 하나도 안 나오잖아요." "행간을 읽어. 내가 볼 땐 딱 그 소리구만 뭘."
"음, 뭉텅 잘린 뒷부분은 뭘까." "언니가 말한 내용 대로 끼워 맞추면 대강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닐까요?" "글자수가 안 맞아. '이렇게'도 아닌 것 같아." "그럼 수없이?" "오호, '수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직도 한 글자 많아." "'들'을 빼는거 아닐까요?" "아냐, 저긴 복수형이었어." "......어떻게 그런 식으로만 기억해요?" "세상에는 기억해야할 만한 것들이 이거 말고도 많으니까."
"......" "......" "혹시 '사람'이 아니었던 건가!!" "......대단한데. 사람도 아닌 걸 사랑했던 건가, 세일러문."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요." "알아. 그러고보면 얘네들 모두 별에서 온 녀석들이었지." "별 아닐까요?" "그런가보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기억 나요. 그 다음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기적의 세일러문" "와와와와와, 만세."
(이후 밤새도록 와인을 퍼마시며 신데렐라, 삼국지, 나디아, 비밀의 화원, 마법소녀 리나, 요술소녀, 캡틴플래닛, 피그마리오, 백설공주, 피구왕 통키 등등의 만화 주제가를 머리를 쥐어짜며 완성시키고 장르를 바꿔서 온갖 가곡(...주로 고등학교 음악책에 등장하는)과 동요(아기염소, 노을, 부채춤 등)와 O sole mio, Caro mio ben, 돌아오라 쏘렌토로까지 찍고 이날의 쟁반 노래방은 막을 내렸습니다.)
"힘들었다. 쟁반 노래방 진짜 아무나 하는게 아니군." "이거 학교 다닐 땐 시험도 봤던 노래들인데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는 거죠?" "몰라, 우리 반은 합창대회에서 '유랑의 무리'로 상도 탔었다고. 근데 가사가 하나도 기억 안나." "독일어 과였으니 독일어로 부르지 않아요? 기억 안 날만도 하죠." "말도 안돼. 200번은 연습했단 말야."
"근데 우리 참 묘하게 가요는 안 불렀네요?" "가요에 약해." "왜요?" "부모님이 다 클래식 애호파라..." "그럼 그럴만 하죠 뭐." "거기다가 어렸을 때 독일 갔을 때가 딱 한국 가요사의 분기점이었어." "어쨌길래요?" "나가기 전에는 용필옵화 만세였는데, 돌아오니 서태지가 나왔더군. 그 다음부터는 전혀 따라갈 수 없었지."
"그나저나 우리 밤중에 왜 이러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어요." "왜 그런데?" "시험도 보고, 성적 문제도 해결했더니 마음이 이미 이 도시를 뜬 거에요." "이제 완전히 기차 탄거야?" "집에 가는 기차 타버린 거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기차 여행할 때나 하는 이런 짓을 할리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내일부터 피렌체 여행기~>닫기
|
|

독특한 것, 희귀한 것, 아름다운 것들이여, 오라!
by 절세마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