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마지막 탈출기 - 피렌체, 나의 사랑하는 (3)
"있지, 수업 끝나고 조교가 '님 다음주 발표에 당첨되셨심 ㅋ' 하고 가버렸어."
"저런, 갑자기 왜요?"
"다음 주 발표팀이 1명은 행방불명, 1명은 결석 예정, 나머지 3명은 중국인이라고 갑자기 차출당했어."
"......딱하긴 한데 꼭 이유가 있어야만 포스팅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의 끝에서 마지막 탈출기 - 피렌체, 나의 사랑하는 (3)

[Palazzo Vechio, 베키오 궁]

"토스카나 공국의 중앙청사였고, 당시에 메디치가가 집권해서 저기 보이는 처마 아래 벽면에 메디치 가 문장들이 잔뜩 그려져 있어. 지금도 일부는 시청사 건물로 사용한다고 하더군."
"겉보기에는 상당히 수수해요."
"응, 근데 들어가면 여느 이태리 건축들처럼 호화찬란해."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날 미치게하지. 이 자식들 벽에 그림 그린 것 좀 봐. 저게 부조가 아니라 다 붓질한 거라니까. 덕분에 방 안은 훨씬 넓고 화려해 보이는데다 공간 자체가 '방'이 아니라 왁자지껄하게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별세계 같아."



"정부 회의장으로 쓰였던 홀인데, 양 옆에 보이는 거대 프레스코화는 조르지오 바사리[Gorgio Vasari, 1511~1574]와 그 일당들이 메디치 가의 전투 장면을 소재로 그렸다지."



"바사리? 또 첼리니 같은 사람인가요?"
"무, 무, 무슨 소리야. 첼리니보다 엄청 근면 성실한 사람이야. 그런 소리 들으면 화낼 걸."
"뭘 했길래요?"
"그림도 그리고, 건축에, 글도 쓰고. 우리가 지금 '고딕'이니, '르네상스', '비잔틴', '매너리즘'이니 하는 장르 개념어를 만들었어. 이태리어로 리나시타Rinascita라고 하는 르네상스, 그러니까 이 시대를 지칭하는 용어에 '부활rebirth'의 의미를 첨가한 것도 이 사람 아이디어야."
"오호, 그건 몰랐어요."
"베키오 궁 개조 작업도 이 사람이 했고, 공작님을 설득해서 아카데미아도 만들었지.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최초로 '미술품'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미술가'들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전기를 썼다는 거야. 제목이 아마 대충..."
"......"
"[아레초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지오 바사리가 토스카나어로 저술하였으며, 그들의 예술에 대한 유용하고도 필요한 서문이 포함된, 치마부에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탁월한 이탈리아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 (LE VITE DE' PIÙ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 ARCHITETTORI ITALIANI, DA CIMABUE INSINO A' TEMPI NOSTRI, Scritte DA M. GIORGIO VASARI PITTORE ET ARCHITETTO ARETINO, Di Nuovo dal Medesimo Riviste Et Ampliate CON I RITRATTI LORO Et con l'aggiunta delle Vite de' vivi, & de' morti Dall'anno 1550 infino al 1567)]"
"......"


"줄여서 [예술가 전기]라고 부르기도 해. 당시 피렌체 공작님이었던 코지모 1세 대공(1519~1574)한테 헌정되었다더군."
"......짧은게 있으면 짧은 걸로 말해요."
"하지만 이렇게 긴 제목, 보통 성실해야 붙일 수 있는게 아니지 않겠어? 한번쯤 불러주는 게 예의랄까."


[Victory. 1520-1525. Michelangelo]


"개인적으로 첼리니랑 바사리 중에 누굴 더 좋아하세요?"
"......보티첼리랑 티치아노."
"선택지에 없는 걸 답으로 고르지 말아요."
"어려워. 바사리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살리에라(소금그릇)가 너무 좋고, 이제 와서 첼리니를 좋아한다고 하면 변태로 몰릴 것 같아."
"그렇다면 전에 했던 질문이랑 비슷하지만 바꿔서 다시 물을게요."
"뭔데?"



"다시 태어나서 프랑수아 1세와 코지모 1세가 될 수 있다면 누굴 선택하실래요?"
"......"
"......"
"전에 물었던 '베르사유'냐, '메디치'냐 보다 백배는 어려운걸."
"뭐가 어려워요."
"생각해 봐. 뒷치다꺼리 할 일을 하나 가득 달고 다니지만, 매력있고 솜씨가 좋아서 근사한 걸 만들 때마다 충동적으로 들이닥쳐서는 '나 잘했죠? 칭찬해주세요+_+'라는 광선을 내뿜는 오갈 데 없어진 고양이 같은 남자랑, 방구석에 쳐박혀 있나 싶으면 조사한다고 밖에 뛰쳐나가서 열띤 표정으로 미술관(그땐 미술관이 아니었겠지만)과 미술가네 집을 싸돌아다니다가 어느날 아침 상기된 얼굴로 뛰어와서 '드디어 다 끝냈어요.+_+' (한 호흡 쉬고) '꼭 제일 처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라며 수줍게 원고 뭉치를 내미는 순수한 학자 타입의 남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끌려?"
"......그런 걸 물은게 아닌..."
"하아, 난 둘 다 버릴 수 없어."
"저기, 엄청나게 자기 취향으로 미화된 것 같은 장면 설명은 뭐죠. 저 사람들 저거 만들 때는 다 4, 50대 넘기지 않았어요?"
"본래 망상에 한계란 없는 법이잖아.."
"너무 서슴없이 제로의 영역에 드나들다 보면 건강을 해쳐요."



"프랑수아 1세를 선택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임종을 지켜보고 경외의 표현으로 안아줄 수 있다는 옵션이 붙어있기는 해."
"그런 맥락이라면 메디치 가를 택해야 보티첼리 그림을 숨겨놓고 혼자 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
"......"
"너 진짜 천재구나. 보티첼리의 [봄 Primavera]에 제목 달아준 것도 바사리니까 분명 가능성 있어."
"지금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눈을 빛내며 기뻐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 날 여기도 축제여서 나름 가장 행렬도 지나가던 걸. 적당히 소규모이긴 했지만 분위기는 꽤 났어."
"...축제 안 보고 뭐했어요?"
"좀 보다가 다리 건너서 피티 궁에 다시..."


[Palazzo Pitti. 역시나 외관만 수수한 피티 궁]

[그 내부 OTL, 하앍]


"......"
"어쩔 수 없었다니까. 안나 마리아 루이자 드 메디치 님이 인도하셔서 이 날 거의 죽을만큼 달렸다고."
"네, 네. 그러셨겠죠."
"어쨌든 여기 이 아저씨 좀 봐."


"와, 행복해보여요."
"피렌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나도 저 날까지는 저러고 돌아다녔어."
"......저 날까지는?"
"파산의 아리아가 들려오기 직전이었으니까."




당연하지만 중간에 저 망상은 진짜 망상일 뿐입니다.
함께 망상해주세...속으시면 곤란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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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4/11 02:39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핑백(2)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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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카시아파 at 2007/04/11 03:09
왜...과제가 많으면 돌려막기로 딴 짓을 하고 싶어지는 지 정말...
저도 책상 옆에 쌓아놓은 책과 논문이 무려.....그러나 결코 그쪽으로 얼굴을 돌리지는 않고 있다는... 흑흑흑~~~
Commented by 나무벌레 at 2007/04/11 07:08
그동네는 바싸리로 그저 도배되어있던데요..-_- 휴..
(저도 내일 웍샵 과제 있어서 해야하는데 딴 짓중.)
파산의 아리아라. 저도 그거 들어봤어요. 아주..아주..아주....그냥..


(꽥꽥꽥!)
Commented by 키르난 at 2007/04/11 08:31
망상이지만, 둘 중 어느 쪽도 절대 놓칠 수 없다는 점이 매력이지요.+ㅆ+
Commented by esatto at 2007/04/11 09:19
정말 외관만 수수한...
둘 다 가질수는 없는걸까!! 라고 외쳐도 어차피 망상인건가요 그렇다면 즐기는수밖엔 없어요...<뭘
Commented by 에이미 at 2007/04/11 12:27
우웃... 겉을 수수하게 만들어서 속이다니! 저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걸 건물에 갖다붙여놓다니, 이건 정말 나르시즘의 극치 아닌가요! 게다가 그런 게 제 취향이라 더더욱 orz입니다. 지금이라도 피렌체에 가고싶어요. 흑흑.. 딴 얘기지만 피렌체 달력(아발란체 것)을 친구에게 주길 잘 했다는 생각과 괜히 줬다는 생각이 함께 드는군요. 이 모순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ㅠㅠ
그리고, 마녀님~ 망상 더 하셔도 돼요..으흐흐.
Commented by muru at 2007/04/11 16:33
아하하~ 제로의 영역!! 망상은 소녀의 에너지의 원천일지도요:>
외관만 수수한 저 궁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보러오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듯한 느낌입니다.
파산의 아리아가 들려와도 행복했던 마녀님의 기억, 피렌체의 추억을 엿 본 것 같아요~
Commented by 김정훈 at 2007/04/11 19:13
아, 피렌체 못 간 게 정말 후회되게 만드는 사진들이로군. 이번에 미술론 입문 듣는데 줏어 보고 온 게 있으니 더 재밌다 ㅎ. 역시 아는만큼 보이나벼.(보는 만큼 아는 건가?)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7/04/11 23:36
카시아파님//저도 막...전공 서적 10권에 비전공서적 10권을 도서관에서 빌려와 놓고는 후자쪽에만 눈길주고 하루에 한 권씩 읽고 있지 말입니다. 하아..

나무벌레님//바사리가 워낙 오래 이 동네에 고용되어있었으니까요. 어머, 써놓고 보니 '이 동네'래...피렌체요 OTL. 하지만 뭐랄까, 피렌체에서 들려오는 파산의 아리아는 참 감미로웠다는...그게 문제라는...

키르난님//저 당시 위정자라면 모름지기 양손에 떡을 쥐고도 입에 하나 더 물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매력(응?)

에사찡//진짜 '부'라는게 뭔가 느켜져욤 ㅠㅜb

에이미님//피티궁은 나중에 피렌체 포스팅 1월달분 또 해야할 때 써먹으려고 남겨뒀는데 그쪽 포스팅하면 진짜 뒤집어지시겠네요. 그리고 그럴 땐 친구분을 꼬셔서 '그리스 해안가 달력'을 내놔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달력으로는 최고지 말입니다. 낄낄

무루님//흐흐, 절 너무 잘 아시는군요. ㅠㅜb 취향이 맞는 동네에 가면 해파리처럼 부유하며 붕 떠서 다니는지라...

김군//'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하고 유홍준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비.
Commented by 泰虛 at 2007/04/12 05:17
저분, 파산신 영접후 초월자의 행복을 느끼는 중이신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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