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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탈리아였다. 르네상스 시대였을지도 모른다. 이왕 이탈리아면 좀 평온한 시기였으면 좋았을텐데, 하필 또 전쟁 중이었다. 사교계에서의 물밑 작업 뭐 이런 것도 없이 앞뒤 다 잘라먹고 한밤중에 기습이 시작됐다. 지방 영주 간의 싸움이었는지 갑작스러운 습격에 성을 사수해야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영주가 급하게 자신의 친구이자 오른팔처럼 부리던 사람을 불러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 했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상대편 적진, 영주의 곁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 배신자, 어떻게 나를!! 이라며 영주가 망루 꼭대기에서 주먹을 그러쥐고 탄식했다. 그러고는 의욕을 상실했다는 듯이 주저앉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낙담하고 있는 영주를 끌고 내려와 마차 안에 밀어넣었다. 식솔들은 이미 그 안에 타고 있었다. 식솔이래봤자, 영주의 젊은 아내, 영주의 어린 아들, 그 아들의 놀이 친구, 유모, 영주의 조카 정도였다. 나머지 살아남은 병사들과 기마병 몇을 이끌고 북쪽방향으로 난 지하통로를 빠져나가 도망쳤다. 마차 문짝에 떡하니 문장이 그려져 있길래, 혀를 차면서 손으로 스윽 만지니 지워졌다. 마법같았다. 우거진 숲길과 산길을 넘고 강과 늪지를 건넜다. 모나리자 배경으로 나온 것 같이 아슴푸레한 풍경이었다. ![]() 배신과 대패의 충격으로 실의에 빠져 아직도 회복이 되지 않은 영주가 쉬었다 가자고 했다. 미쳤냐고, 방금 쟤들이 우리를 발견했다고, 멈추면 죽는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믿지를 않았다. '병사들도 지친 것 같은데' 라며 핑계를 대길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버리고 간다'라고 우겨서 밤까지 한나절을 더 달렸다. 가까스로 왕의 직영지에 이르렀다. 진짜 왕이 있는 수도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이지만 설마하니 직영지에서까지 난리칠까 싶어서 공관에 짐을 풀었다. 다들 오래간만에 씻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자면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는 환영의 군사들이 이 공관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없는지 연기로 그림을 그려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영주(그러니까, 상대편)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몇 년 전에 잃어버린 녀석을 어떻게 찾으라는거야', '옛날에는 이렇게 생겼으니까 지금은 이렇지 않을까' 대강 이런 대화가 오가면서 연기는 아버지와 함께 정원에서 뛰노는 발랄하고 행복한 꼬마에서 제법 자란, 열한살 정도의 남자 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환영의 군사들이 만든 그 영상은 초상화 처럼 얌전히 서 있었는데 나와 마주 보고 있는 방향에 서 있어서 그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눈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났다. 이쪽 영주 아들의 놀이 친구였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옆 방으로 뛰어가 자고 있는 영주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얘기를 들은 그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한참동안 기억을 헤집다가 마침내 떠올랐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친구이자 가신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배신자인 그 녀석과 지방으로 사냥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녀석이 어디선가 주워왔고,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집이 어딘지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아 데려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녀석의 배신은 그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전율했다. 또다시 습격이 시작되었다. 한번 잠에 빠진 병사들은 깨어날 줄을 몰랐다. 마신 물에 수면제라도 탄 건가.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영주와 영주의 아들, 그리고 그의 놀이 상대이자 저쪽 영주의 잃어버린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뿐이었다. 제기랄,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수는 없어, 라고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공관은 포위되었고 우리에게는 병력이 없었다. 기세좋게 저쪽 영주가 칼을 빼들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있었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저쪽이 잃어버렸을 아들 녀석을 인질로 잡았다. "이 녀석을 돌려받고 싶어서인가." 그는 느릿한 비웃음을 입가에 걸치고 짧게 말했다. "글쎄." "우린 네 아들을 납치한 적이 없어. 나도 방금 알았어. 모든 건 그 배신자 녀석이 꾸민 일이야. 착각이고 오해라고." "오해?" 그래, 오해야, 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또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설마 오해가 아니라 이 녀석도 함께 꾸민 계략이었나. 이런 때 그럴 듯한 명분으로 써먹고 상대편을 치졸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왜. 자기 아들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오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지. 어쨌거나 나한테는 유리할 뿐인데." 그는 혼란에 빠진 채로 손을 늦추지 않고 있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첫번째 이유로는 말이야... "암살의 위협을 피하려면 차라리 신분을 감추고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위치에, 그러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있는게 좋거든. 그런 의미에서 적이라곤 나밖에 없는 정적의 아들 곁은 썩 나쁘지 않더군." 미친 놈,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지, 거기가 그 녀석 엄마 옆이기도 했거든." "뭐?" 잠시 상황파악이 안됐는데 뒤에서 '아아, 루크레치아'하는 탄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였다. 루크레치아는 그 아내의 이름이었다. --------------------------- 배신과 모략이 횡행하는 이탈리아. 나는 여기서 깼는데 이 뒤는 대체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나는 대체 무슨 포지션이었던겨...) # by 절세마녀 | 2007/06/29 14:44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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