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너무 길었죠? :)해적이여, 시인이 되라 (1) 잔물결 이는 바다로부터 지중해 특유의 맑고 따스한 해풍이 불어왔다. 바람은 거리에 늘어선 오렌지 나무의 짙고 반들거리는 나뭇잎 사이를 돌아 말라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요새 알카자바에 이르렀다. 성채를 등진 남자는 이례적으로 화려한 정장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갖추어 입고 있었는데, 뒤돌아선 모습에는 화려한 색감과는 사뭇 다른 우수가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또 한 차례, 바람이 불어오자 모자에 달린 큰 깃털이 희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아, 정말이지...' 문득 남자가 감탄하듯 입을 열었다.
"죽기에 좋은 날이로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일곱 바다에 악명 높은 해적 선장.
대꾸는 없었다. 아래에 사열한 병사들 역시 투구에 달린 붉은 술이 잠시 남실댄 것 외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남자는 뜻모를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나무 기둥에 양손을 묶여 매달려 있는 꾀죄죄한 남자를 이리 저리 뜯어보았다. 회색빛 머리와는 다르게 가까이에서 본 사형수는 생각보다 매우 젊었다. 이렇게 묶여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마구 헝클어뜨려진 머리가 아니었다면, 몸도 남자답게 꽤 탄탄하고, 밖에서는 호인 소리 들었을 법한 인상이다.
그러나 지금 이 꼴을 네 녀석의 연인이 보게 된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남자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떠나가는 배의 깃발처럼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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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이여, 시인이 되라!-
가난한 해적 선장 이르반의 수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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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번화한 항구를 조심스레 등지고 다니던 그가 세비야에 정박한 것은 매년 돌아오는 가족관계의 모임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번 이야기에서 그의 가족사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소한 만남이 위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뜨거운 여름의 한복판, 청년 이르반은 목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좁은 뒷골목에서 빠져나왔다. 도시 전체가 폭염의 눈을 피해 달콤한 낮잠에 빠져, 한낮의 광장은 고요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따금 문을 열고 있는 가게가 있었지만 주인은 꾸벅꾸벅 졸거나 부채질을 하면서 딴청 피우기 일쑤였다. 정말이지 한가한 동네로군, 내가 살던 북구라면 해 떠있을 때 낮잠같은 건 상상도 못할 일인데. 덕분에 긴장 안 하고 돌아다닐 수 있어서, 그건 좋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더위는 현기증을 동반할만큼 강렬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훈풍은 형체 없는 뱀처럼 목덜미에 감겨 도무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남자 자신도 습관 때문에 낮에 나오긴 했지만, 나오자마자 어느 그늘에서든 기대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여하튼 어지간히 더위에 쩔어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리숙한 애들도 아니고, 장애물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드는 황소도 아닌데 이 시간에 에스파냐 광장 한복판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힐 일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칭 북해 바다를 주름잡는 사나이 이르반이 어리버리하게 지나가던 소년과 정면충돌해 벌러덩 넘어진 것에 대해서는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길거리 건달들이 시비걸 때나 쓸 것 같은 이 상투적인 대사를 끝맺지 못한 것은 상대방이 제풀에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고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냥 넘어졌다치고, 시야를 다 가릴 정도로 많은 물건을 한아름 안고 간신히 걸어오던 소년은 몸이 어찌나 가벼운지 저 멀리까지 날아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르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허둥대며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담는 모습도, 작은 몸에 꼭 맞는 집사복도, 긴 팔 셔츠 안의 가는 팔도, 그 팔의 기묘함도, 이상하게 머리에 난 싹도, 뭣도 아니고,
"아, 이런...토마토가..."
...라고 하면서 황급히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드러난 흰 이마,
"빨리 가지 않으면..."
...아래 깜빡거리는 큰 눈,
"주인 마님, 심부름...늦으면...안...되는데..."
...에 그렁그렁 달린 눈물이었다.
이르반은 자신이 그렇게 거칠었던가 싶어 엉겁결에 바닥에 흩어진 토마토와 레몬, 오렌지 등등을 같이 주섬주섬 주워담았다. 힐끗 쳐다보니 소년은 용케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터진 토마토가 운 나쁘게 바지에 튀어서 붉게 물이 들고 있었던가 아니던가, 하지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입고 있는 옷의 감으로 보아 꽤 사는 집 하인인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탁 트인 광장에서 눈에 띄게 이러고 있다가는 잡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역시 정말 하나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베리아 반도에 내린 내내 뒷골 땡기게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는 더위의 존재조차, 훌쩍거리느라 오르락 내리락하는 저 가냘픈 어깨와 목선이 만들어내는 뒷모습의 신비에 비하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일단, 그랬다.
"앞장 서라."
이르반의 말에 소년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말을 꺼낸 본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모, 모처럼 한가하니 들어다 주겠단 말이다."
그리고 몇번인가 사양이 오간 끝에 두 사람은 나란히 걷게 되었다. 토마토와 레몬, 오렌지, 햄 등등이 부담스럽게 들어있는 바구니를 양손에 끼고. 넘치는 양이었다고는 해도 이르반은 길을 안내하는 소년을 쳐다보느라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게 무엇의 재료인지 가늠할 겨를도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걸 들고 광장을 빠져나와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었는지 어느새 둘은 사람 키의 두배는 되는 돌담을 돌아가고 있었고, 그로서는 나중에 이 길을 어떻게 되짚어 가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소년은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예민하게 흠칫거렸으므로 이르반은 무심코 뚫어져라 바라보지 않기 위해 상당한 신경을 써야했다. 그렇다고 특별히 뭔가 의미있는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니었다. 호기롭게 집까지 들어다주기로 한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다 워낙 말주변이 없었으므로. 소년도 갈림길에 이를 때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팔을 살짝 들어 방향을 가리킬 뿐이었다.
일곱 번 째 모퉁이를 돌 때까지도 불편하게 미적거리는 공기가 이어졌다. 아직도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 붙여 본 북해의 거친 바다 사나이는 머리 속으로 침묵을 깨뜨릴만한 말을 고르다 못해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화살을 돌려 <주인 마님이란 작자는 누구야, 저 팔에 이 무게가 가당키나 하냐. 게다가 지금 낮잠자는 시간 아닌가? 이 시간에 애를 어디까지 보내서 장을 보게 시키는 거야!!> 라며 마음 속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저기, 감사합니다."
고개를 드니 눈 앞에는 덩굴에 휘감긴 창살문이 반쯤 열린 채였다. 이런, 일단 아무 말이나 할걸. 쓸 데 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달해버렸잖아. 머뭇머뭇하던 소년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쭈뼛거리는 그의 손에서 바구니를 건네받아 추슬렀다. 그 모든 동작이 슬로우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다 끝나버릴 때까지도 그는 마땅히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인사를 하는데도 반사적으로 아, 하며 따라서 멍하니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소년이 돌아서자마자 증발했던 언어가 느닷없이 내리는 소나기처럼 한꺼번에 몽땅 돌아왔다. <이런 바보, 바보, 바보!! 입이 있으면 말을 하란 말이야!! 까악!!> 아버지의 정신나간 앵무새가 머리 속에서 울었다.
소년은 갑자기, 들어가려다 말고 생각난 듯 멈춰섰다. 그리고는 바구니에서 토마토를 크고 실한 녀석으로 하나 꺼내어 흰 셔츠 소매자락으로 슥슥 문질러 닦고는 불쑥, 이르반의 눈 앞에 내밀었다.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아이야, 나는 거친 바다 사나이. 앞으로 일곱 바다를 주름잡는 무시무시한 해적왕이 될 거란다. 그런 나에게 토마토라니, 토마토라니. 하다못해 이왕이면 그 안쪽에 맛있어 보이는 햄(하몽)이라든가, 햄(초리초)이라든가, 햄(살라미)이라든가 여러가지가 있지 않니. 내 이 중후한 수염과 거친 인상을 보아라. 이런 일로 햄을 받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겠지만 그래도 토마토는 좀 심하지 않겠니. 내 아무리 이곳에서 알려져 있지 않다 해도, 그래도 일단은 해적인데. 토마토는 우리 바다사나이들에게는 수, 수치이며 사치야.
그런데 네 손에 들려있는 그 토마토, 참으로 발그레한 것이 왠일로 탐이 나는구나.
쯧쯧쯧. 운명이. 별거야.
다. 그런거지, 뭐.
...라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에 이끌린 이르반이 일상적인 식탐을 누르고, 탐스럽게 익은 토마토를 향해 마치 환상에 홀린듯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만하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그는 이 스페인 땅에서 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 1순위와 마주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단..................
우리 소년 알프레도 너무 미화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반하면 다 그런거 아닌가효.
바로 이녀석
그리고 역시 스페인의 러브리 아이템이라면 토마토(...) (궁금하신 분은 [내일의 나쟈] 26화를 참조하세요)
아참, 이건 다 막판 개그를 위한 밑밥용 로맨스(...)입니다.
밑밥이라도 미안해하지 않을게, 이르반.
보다시피 돔군이 캐릭터 사용권을 내게 넘겼거든.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2편은 내일...몇시쯤으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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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절세마녀 | 2007/08/29 12:46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핑백(3)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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