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국의 전설적인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와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의 캡틴 잭 스패로우, 데자키 오사무 감독 작 [보물섬]의 실버 선장, 네버랜드의 영원한 주인인 후크 및 기타 비슷한 낭만적 무법자들이 판을 치던 황금시대에 대한 오마쥬 ...라고 말했다간 저분들이 꿈 속에서 깽판칠 것 같고요(...) 해적이여, 시인이 되라 (4)
한편, 에스파냐 해군 수뇌부는 발칵 뒤집혔다. 신대륙에서 흘러 들어와야 할 막대한 황금이 매번 해적들에게 탈취당하는 것도 모자라, 별 것 아니라고 무시하던 해적들에게 상선이고 군함이고 모조리 박살이 나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등 북해의 여러 국가로 보낸 해적 소탕 협조 요청이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낭보가 최근에 들어왔다. 자국의 함선을 습격하는 것만 아니면 대강 묵인해주던 정도에서 아예 왕실이 '모범 해적' 리스트를 만들어 발표하고 관리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있었다. <해적질을 장려해? 어쩐지 미적미적거리더니 꿍꿍이가 있었어.> 각지의 해군 사령관들은 이를 갈았다. 얼마 후에는 그들이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며 왕실에 고용되어 있다는 놀라운 풍문마저 들려왔다. <뭐라고, 우리도 벌써 몇달치가 밀렸는데!!> 사령관들은 안달루시아의 뜨거운 태양처럼 작열하는 분노를 토해냈다. 거기다 보너스로, 노략질한 재물은 고스란히 그들 자신의 것이 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사령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외쳤다. <썰어버리겠어!! 저놈들을 싸그리 잡아다 투우장에 쳐넣고 황소와 함께 썰어버리겠어!!>
이런 해군의 움직임을 읽기라도 한 양, 에스파냐 왕실에서는 소위 '자랑스러운 잉글랜드의 모범해적' 리스트에 올라있는 해적들의 뒷조사를 하는 한편, 그 목에 걸려있던 현상금을 세 배로 올렸다. 왕실 입장에서는 놈들이 잡히기만 한다면 지불액의 몇십배에 해당하는 황금 교역이 안전을 보장받게 될테니 아까울 것이 없었다. 이에 해군 사령관들 뿐 아니라 웬만한 함선을 가지고 있고, 포술과 칼솜씨에 자신이 있는 자들은 2%의 애국심과 나머지 물욕의 화신이 되어 해적 루트에 뛰어들었다. 카리브와 신대륙 연안은 연일연야 이어지는 해전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자기도 모르는 새에 모범해적이 된 이르반은 이 직전에 북해로 돌아갔고,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뭐, 그건 그쪽 사정이고.
대부분이 일확천금의 기회에 매료되어 해적 잡는 해적질에 몰두하는 와중에도 유별난 행보를 보이는 자가 한명 있었다. 세상 어디에나 그런 사람은 꼭 하나 있는 법이다. 큰 키와 뚜렷한 이목구비, 완벽한 매너로 에스파냐 왕국 해군 수뇌부에서 '최연소'와 '훈남'이라는 두 개의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세비지 사령관은 허무주의에 빠져 이 모든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다. <흥, 해적들을 잡는다고 저 왕실에서 현상금을 순순히 내 놓을 것 같아? 그전에 밀린 월급 정산이나 하라고 해.> 성실한 근무, 유연한 대인 관계, 해상전을 운용하는 탁월한 능력, 든든한 백과 기막힌 운, 그리고 미모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 30세에 벌써 그 자리에 오른 총명한 세비지는,
그 명성이 허망하게도 미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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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이여, 시인이 되라!-
가난한 해적 선장 이르반의 수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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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해적 소탕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 시각, 세비지는 말라가의 집무실 흔들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성실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출근은 했지만 여전히 의욕은 없는 상태로, 소위 그 '모범해적'들에 대한 보고서를 부관에게 하나씩 받아 심드렁하게 읽으며 왕실 사정에 정통한 군인답게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 보고서에 있는 놈들을 다 잡아들이고 3계급 특진을 해도 여전히 월급은 밀릴걸.
"......다음."
왕실에 대한 충성에 비례하여 착취는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지만 그런 비열한 현실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에게는 이런 마음을 이해하고 버팀목이 되어줄 애인조차 없었다. 최연소 훈남 사령관에게 들어오는 맞선 제의는 많았지만, 몽상가 기질이 농후했던 이 바다사나이는 평생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운명을 기다리느라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의 인생에는 드라마틱한 승진과 그에 동반하여 드라마틱하게 증식하는 과다한 업무만이 있었을 뿐, 정작 그럴듯한 드라마는 없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짓눌려 바다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든지도 이미 오래전이었다.
"이...르반. 성은 불명. 나이는 20세 언저리이나 역시 불명. 주로 정면 돌파와 기뢰를 사용하며 특기는 ......노래?" "제가 조사한 것이 아닙니다." "......해적 나라 잉글랜드의 사략 해적들 중 하나...인데 알고 보면 에스파냐 까딸루니아 출신...인듯? 이게 어떻게 된건가." "뭐가 말씀입니까?" "여기서 촌동네 잉글랜드까지 기어올라가 해적이 된 건 그렇다치고 왜 허구헌날 우리 쪽에 싸움을 걸어?"
옆에 서 있던 세비지 해군 사령관의 젊은 부관 노링턴은 흰 가발을 긁적거렸다. 그러게, 더운데 그건 왜 쓰고 있는지 몰라. 아무리 유행이 좋다지만 저게 무슨 꼴인지.
"생부가 에스파냐 사람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왜 그러냐고?"
이르반의 아버지 쥬반은 꽤 잘 나가는 바다 사나이였다. 단지 술을 좀 지나치게 즐겼을 뿐. 여기까지라면 느긋한 스페인 해안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가정 환경이라고 볼 수 있었겠지만 쥬반의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그에게 배를 내어주는 선주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내였던 것. 어느 날 격한 부부싸움 끝에 정신 좀 차리라며 배를 뺏은 아내에게 쫓겨난 쥬반은 그에 굴하지 않고 세살박이 이르반을 안은 채 옆집 친구의 배에 올라 가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출항한지 며칠 되지 않아 배는 폭풍우에 침몰했고, 쥬반은 술에 취하면 발동되는 '귀소본능' 스킬을 이용해 무사히 집에 돌아왔지만 이르반은 영국 상선에 구조되어 영국에서 자라게 되었다. 어린 시절 맛없는 피시 앤 칩스나 먹으며 아버지를 얌전히 기다린 그였으나, 세상에 비밀은 없어서 어쩌다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으로 뿌리를 찾아 스페인 땅으로 왔다가 최초의 한끼 배고픔을 해결한 뒤에는 왠일인지 격분, 전형적인 영국식 사략 해적이 되어 지나가는 스페인 배만 보면, 보이는 족족 때려잡는 것으로 유명한 해적이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자랄 수도 있었는데!! 피시 앤 칩스 따위가 팔할을 키운 나의 지난 17년이란!!
그러나 이런 마음의 절규를 알 리 없었던 노링턴 부관은 상관에게 대충 이렇게 말하고 넘겨버렸다.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요. 삐딱선을 탄 그 나이 또래 남자애들이 다 그렇듯." "자네 얘기 하지말고 아는 대로 말하게." "딱히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그렇군, 세비지는 피로에 지친 눈을 부비며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역시나 쓸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는 아슬아슬한 수준의 보고서였다.
"그 외의 정보는?" "노략질은 그저 그런 수준이지만 인세 수입이 상당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대장은 정색을 하고 젊은 부관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요즘 애들은 진지하지가 못해서 탈이야. 보고 중에 저런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라니, 나도 저런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군기가 빠진 것 같으니 혼을 좀 내야겠어.
"미스터 노링턴. 대체 언제부터 해적들이 살인과 약탈이 아니라 책을 써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지."
그러나 이 스무살 남짓한 젊은이의 얼굴은 낮게 깔린 상관의 목소리만큼이나 다를 바 없이 진지했다.
"그거야 물론 출판 1호였던 이르반의 '사랑하는 알프레도에게' 아닙니까."
사려깊고 총명한 해군 사령관 세비지는 생각했다. 표정으로 보아 놀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아, 혹시 새로이 유행하는 농담일지도 모른다. 무료해보이는 상관을 웃기고 싶은 건가. 기특하군. 그렇다면 맞장구를 쳐 주어도 나쁠 건 없겠지.
"...생각했던 것보단 평범한 제목이로군." "그래도 띠지의 홍보 문구가 워낙 강렬해서요." "대체 뭐였나."
세 가지 정도가 기억에 남는데 말입니다, 노링턴이 기억을 더듬는 것을 보며 세비지는 관대한 상관답게 여유를 가지고 얌전히 직속 부하의 재롱을 기다렸다.
"<나는 바다를 떠도는 슬픈 음유시인>." "......" "<사랑은 거친 파도를 타고>." "......" "<누나, 해적 가슴에도 삼천원 쯤은 있는 거에요>."
이게 과연 웃으라고 하는 소린가, 세비지는 정신적 혼란을 느꼈다.
".....잠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아, 죄송합니다. 제가 발음이 좀 나빠서."
부관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정정하겠다며 발음을 하나하나 또박또박 강조해서 발음했다.
"<누나, 해적 가슴에도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에요>." "......" "......" "......혹시 진짠가? 농담이 아니라?" "제가 감히 어찌 사령관님께 거짓말을..."
말세다. 악당과 왕실만 미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온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어.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촉망받는 인재는 돈도 못 받고 우울증에 빠져있는데 해적은 월급 받아, 보너스 챙겨, 책 내서 돈까지 벌어? 군인이나 해적이나 목숨 내놓고 사는 건 똑같은데. 심지어, 이놈은...이놈은...이놈은...!!!
남색가잖아!!
알프레도라면 남자 이름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상관에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사랑한다는데>라고 대꾸하는 부관의 반응은 그야말로 세기말적 수수께끼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견 플라토닉하면서도 처절하고 절박한 내용이 담긴 문제의 시집은 세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재판에, 재판을 거듭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가질 수 없는 상대에 바치는 순수한 열정이 여성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고, 다음으로는 마음은 있으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몰랐던 남성 독자들의 가슴을 녹이면서 공감대를 형성했다. 덤으로 바다 사나이란 바다에 빠져서 가정은 돌아보지 않는데다 거칠고 무식하다는 전통적인 선입관을 불식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를 가져오면서 연애의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했다고도 전했다. 해적과 해군이 동급으로 묶이고, 바다 사나이들은 연애계의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것이 신세대 부관이 떠벌리고 있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의 이야기였다.
"그, 그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미스터 노링턴." "바다 사나이라면 누구든 한번쯤 읽어봐야할 불후의 명작입니다." "......진심인가." "솔직히 전 시는 잘 모릅니다만, 한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시를 음미했다.
"...울리는 구석이 있거든요."
아무튼 그 뒤로 일곱 바다의 해적들이 저마다 책을 써서 원고를 들고 온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는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세비지의 분노는 고스란히 이르반이라는 전무후무한 괴짜 해적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사령관 선배들이 왜 다들 무식한 해적들과 똑같이 날뛰는지 이제야 알겠군. 무법자 주제에 감히 바다의 낭만을 가로채고 이제는 유명인사까지 되시겠다. 게다가 해적 주제에 애인도 있어!! 하늘이 용서하고, 바다가 용서하고, 잉글랜드 왕실이 용서하고, 독자들이 용서했다 해도 나는...
"용서가 안 되는군."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머리를 좀 쓰게. 방금 말한 게 신뢰할만한 정보라면 출판사 근처에 매복하고 있다가 잡아 족치면 될 것 아닌가. 병사들을 줄테니 실마리가 될 만한 사람이면 누구든 잡아 와."
지금까지 청산유수로 말을 쏟아내던 것과는 달리 노링턴은 쭈뼛거리기 시작했다.
"그게...책에 찍혀있기론 '해적 출판'이라는데...신생 출판사인지 통 위치를 알 수가..." "......" "2권이 나올까 싶어 나름대로 조사해보았지만, 사실상 실체가 있는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쓸 만한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이리저리 찔러보았지만, 명확해진 것은 자신의 부관과 휘하 병사들 모두 그 시집의 팬이라는 것밖에 없었다. 머리 회전이 비상한 세비지 사령관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미스터 노링턴...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네, 사령관님." "지금까지 말한 정보의 출처가 어떻게 되나."
직속 상관의 진지한 물음에 앳된 얼굴의 해군 장교는 비로소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자 후기입니다."
...... 머리가 아파진 세비지는 왕실의 촉망받는 월급쟁이의 이미지고 나발이고, 마음의 안정을 위해 세비야로 휴가를 떠나버렸다.
...음 약간 오해(?)이긴 하지만 그런 소리까지 듣게 된 이르반에게 조금은 미안한 기분이 드는 것...같...기도...하고요. ㅋㅋ
띠지 멘트 중에 하나는 슬레이어즈 제르가디스 대사 패러디인데 기억하시는 분들 있을지 모르겠네요. 트라이엔가 <나는, 황야를 떠도는 슬픈 개조인간>운운 하는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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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절세마녀 | 2007/09/01 18:20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핑백(2)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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