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번째 탈출 : 바다, 지중해, 그리고 니스 (1)



2006년 10월의 바다에서




10월 12일-10월 18일 파리
10월 27일-10월 31일 니스->...



눈썰미가 좋으신 분이라면 공지 겸 방명록 글에 꽤 오랫동안 업데이트 되지 않은 채로 덩그러니 뼈대만 남겨두고 있는 여행일정을 보며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쩜 넌 열흘을 못참니. 쫌 붙어있어 봐봐.>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한데 맹세코 한국에서는 내가 그렇게 여기저기 종횡무진 싸돌아다니는 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곳에 정 못 붙인다고 해서 그렇게 티내며 탈출을 시도한다든가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일년에도 여러 번씩 친구들의 거주지가 바뀌는 녹두거리에서 줄기차게 세월아, 네월아 5년동안 한 자취방에서 살았다는 기록적인 역사로 증명할 수도 있다.


하긴 시골에, 깡촌이라도 따뜻하고 조용한 프랑스 남부의 액상프로방스 같은 곳이었다면 또 모른다. 거기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일은, 정말 정말 안타깝게도 그 도시에서 탈출하는 것 뿐이었다. 너무나 볼 게 많아 정신이 없던 파리에서 짐짝을 끌고 4시간 반 걸려 카이저스라우테른 기차역에 내렸을 때, 뭐라 말할 수 없는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흐르며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을 갖고 내게 명령했다. <김기사, 차 돌려. 도로 가자.> 파리와 세상의 끝. 아마 낙폭이 너무 커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지금까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그런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 도시는 이미 존재 자체가 나한테 꽤 당혹스러운 곳이었다.


거기서 봤던 학생 중 하나가 이번 학기에 우리 학교에 와 있길래 사는 거 어떠냐고 물었더니 사람도 많고, 할 것도 많고, 친구들이 연일연야 술 사주고 해서 완전 재밌단다. 음, 그래. 뭐. 그렇겠지. 잘 있다니까 좋긴 한데 좀 착잡한 마음이 되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니네 학교 있을 때 얼마나 지루해서 환장하고 있었는지 이젠 이해가 되지?> 그 애는 그 말을 듣더니,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리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니스에는, 그런 때 갔었다. 한 열흘 정도 기숙사에 짐 풀고, 서류 처리하고, 등록할 거 등록하고, 애들하고 얘기도 좀 하고, 수업도 듣고. 그러다 시내에 나갔는데, 이건 아냐. 나으 유럽은 이래선 안되는 거라. 이쯤되면 도대체 어땠길래, 하고 궁금해할 법도 하지만 나에겐 그곳을 추억할 단 한장의 사진도 없다. 찍은 적도 없고, 찍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설령 찍었다 하더라도 이전 포스팅에 한번 써먹고 곧바로 지웠다. 사진이라는 것이 그 대상에 의식적인 눈길 한번, 생각 한번, 애정 한번을 더 주는 것임을 감안하면 역으로 내가 (그리고 하이디도) 얼마나 그곳에 애정을 가질 수 없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여하튼.




니스와 깐느라 하면 나의 지중해 연안 바닷가에 대한 거의 모든 환상이 농축되어 있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탈출에 급급해 아무렇게나 짐 싸들고 나왔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역사적 배경이나 뭘 보아야 한다든가, 그런 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더 추워지기 전에 지중해를 보지 않으면 안돼, 라는 충동이 절반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이미지란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을 이리 저리 끼워맞춘 알량한 퍼즐과 다르지 않아서 뭔가를 떠올리려고 해봐야 노란 페라리 스포츠 카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쪽빛 바다, 출렁이는 금발에 꼭 맞는 황금빛 태양, 피카소, 그리고 이사도라 덩컨이 목에 두르고 다녔을 바람에 휘날리는 스카프(비록 그것 때문에 비명횡사했지만) 그런 것들 뿐이었다.




어렸을 때 바다에 풀어놓으면 죙일 뛰놀다가 버리고 집에 간다해도 몰라라 할 정도였다고 하나, 철들고 발바닥에 모래 묻는 것이 싫어진 뒤로 해수욕에 대한 욕망은 일찌감치 버린지 오래. 물론 '바다'는 여전히 좋아하지만 바닷가에 가면 필연적으로 맡아야하는 후덥지근한 공기와 습기로 눅눅해진 짠내는 좋아하지 않으므로. 가보지 않은 바다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것은 그곳에 대한 정보를 오직 TV와 사진, 인터넷으로 접하기 때문이며, 그 때 전해지는 영상에 짭짤한 바다 내음이나 찐득한 습기는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 지중해와 카리브해, 그리고 남태평양 한 가운데 타히티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바다’에 대한 최후의 희망이자 아직 열지 않은 보물상자와도 같다.



자, 지금 나는 니스에 있다. 도시에 대한 것이라면 만족했다고 말할 수...음...글쎄, 있을지 없을지. 이색적이기는 한데 막 새롭다거나 그렇지는 않고, 굳이 말하자면 '누구나 받아들이다보니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조금은 이상하고 조금은 지저분한 동네'정도에서 시작할까. 기차역부터 해변까지, 걷는 동안 도시 느낌이 참 여러번 변한다. 이를테면,


흡사 뉴델리와도 같은 번잡한 기차역과 상점가,


중세 성채가 남아있는 도심 속의 공중 정원은 그야말로 딴세상이며,


그 아래 구시가지는 유럽 어딘가의 좁고 어둡지만 볼거리가 많은 여느 뒷골목스럽고,


해변에 인접한 카지노와 호화로운 호텔들은 라스베가스를 떠올리게 한다.


어지럽게 정박한 요트 사이로 피어오르는 부의 향기(...)


그런가 하면 이렇게 고요하고 여유로운 오후의 빛에 감싸이는 시간도 있다.



[Marc Chagall, 아가 III ]



그래서...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정신없고 산만한데 어떻게 그림은 나오는 게 꼭 후기 샤갈 그림 같달까. 물론 그는 러시아 출신이고, 여기서 째끔 떨어진 방스(Vence)에서 살았다. 하지만 여기나, 거기나. 어쨌거나 이 동네가 좀 그렇더라고. 서로 다른 것들이 그 어떤 규칙이나 구획과도 관계없이 여과 없이 섞여있는데, 그런데도 다들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신기하기도 하지.


[클릭해보아요]



이 사진만해도 부두 끝 쪽에는 이 동네 사람인 듯한 남자들이 낚시를 하다말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반대편에는 중국인처럼 보이는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바다를 보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고, 그런 황망한 가운데 샤갈이 그린 그림의 아담과 이브처럼 자갈밭에 누워 지근거리는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 한 장면에 담겨져 있다. 나름 무슨 지구, 무슨 지구 하며 나눠져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그 구획이라는게 좀 모호하다. 길도 적당히 신호 안 보고 건너도 되고. 어느 쪽이 구시가이고, 신시가지인지 걷다보면 어느 새 다른 곳에 와 있고. 기타 등등.



장르로 치자면 들꽃과 잡초와 비싸보이는 나리과 꽃들이 뒤섞여 있는 한 다발의 잡탕꽃다발, 그래서 무대에 올리면 소위 엄격한 장르주의자들에게 말 많이 듣고 손가락질 좀 당했을 것 같은, 그러나 역시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해 눈길을 뗄 수 없는.



하긴 내가 갔을 때는 막 성수기 휴가철이 끝나 미뤄두었던 공사를 한꺼번에 하는지 여기저기 길이 파헤쳐져 있어 더 복잡하고 산만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바다. 바다는 참 맘에 쏙들게 볼만했다. 시끄러운 차도와 도시에 등을 돌리고 바라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감람의 바다 Côte d'Azur. 하늘이 몇 번씩 겹쳐져 빚어진 사파이어가 풍덩하고 뛰어들어 수면 언저리에서 빛과 함께 너울거리다 이윽고 반짝이는 파도로 부서지는 바다.


그래, 이런 바다라면. 밤기차를 타고 세상의 끝에서 빠져나오느라 생긴 10시간 짜리 피로를 가뿐하게 무시한 채 자갈 해변에 앉아, 그래, 이런 바다라면 정복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뭔가를 좋아해도 꼭 그걸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런 류의 리액션을 상당히 풋, 하고 웃어넘기는 쪽이었는데, 음. 고백하자면, 오르세와 마르모땅의 그 많은 모네 그림들 앞에서 넋을 놓고 그 아름다움에 반하면서,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생각이 있었으니 <아, 대체 왜 나는 이걸 집에 가지고 갈 수가 없는 거야, 왜.> 였다. 맨정신으로 다시 생각하면 말도 안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다' 라는 욕망에 불타본 적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하나쯤은 있겠지. 이를테면 위에 정복 운운 한 건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 눈부신 태양 아래 전신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바다를 보며 물결이 자갈밭에 일렁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아,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이 순간을 손으로 한 줌 쥐어 머리맡에 떠놓고 늘 가까이 하고 싶다> 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수천가지 스펙트럼으로 빛나는 바다의 깊고 다양한 빛깔 중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파도가 까르륵거리는 둥근 자갈들의 웃음소리를 품은 채 이 열손가락 사이로 하릴 없이 빠져나가게 놓아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바다에 발을 담그고, 그 바다에 뛰어들고, 그 바다를 끌어안고, 그리고 또 하염없이 바닷가를 거닐며 떠나려는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게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에 갔다가 너무 좋은 나머지 발을 닦으러 간다면서 계속해서 일부러 넘어지던, 아주 먼 옛날의 나처럼. 그러한 생각이 어른의 때가 묻으면서 ‘이 바다를 손안에 넣고 싶다', '가지고 싶다', '정복하고 싶다’ 로 주체할 수 없이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 만도 하지. 이 바다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




다시 위로 올라가서, 앞에 걸어둔 동영상, 그 때만해도 동영상 찍는데 익숙하지 않아 품질은 좀 그렇지만 시간이 나면 잠깐 들여다 보시기를. 그러면 시몬, 너에게도 들리겠지. 바람 부는 소리에 섞여 오락가락하는 파도가 꼬맹이 자갈들을 간지럽히며 데리고 노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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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9/18 02:24 | 중앙광장:방랑자의피리소리 | 트랙백 | 핑백(3)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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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리아 정도만 가도 길거리에서 평범하게 모자가게를 만나기보다는 명품이나 브랜드샵에 곁다리로 끼어있는 경우가 많다. 때는 2006년, 세상의 끝에서 프랑스 남부의 니스로 탈출 했던 그때, 나는 그저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바닷가로 향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저런 부띠끄에서 발목을 잡혀 반나절을 날리곤 했던 것이다. 모자가 화 ... more

Commented by 정모씨 at 2007/09/18 03:19
멋집니다............저도 어디로 떠나고 싶어요-
Commented by 수현 at 2007/09/18 08:02
바다가... 바다가... 정말 예쁘군요....! ㅠ_ㅠ 훌쩍 떠나고 싶어졌어요.
Commented by Energizer at 2007/09/18 11:02
저도 한가로운 니스의 바다가 넘 좋아요!
메인 사진은 혹시 베니스 가면축제??^^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7/09/18 11:54
정모님// 이궁...일본이 지금 그렇게 더우시다니 더나고 싶어질 만도...어떡하나용 ㅠㅜㅠㅜ

수현님// 후훙..예쁘죠 //-// 사실 이거 거진 다 써놓고 여름에 올리려던 거였는데(우훗)

백만스물둘님// 메인사진이랑 왼쪽에 메뉴바 둘 다 2007년 베니스 카니발 사진이랍니당. 잠깐 공개하고 닫아버렸지만요.
Commented by 선아 at 2007/09/18 12:49
우와...ㅠㅠ 아 전 벨기에에 꼭 가고 싶어요! 절세마녀님 음식만담을 보고 가고 싶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ㅠㅠ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7/09/24 01:32
초콜렛이 특화된 나라라...국가적 상품이 그런거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은 푸근하게 혀는 즐겁게 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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