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동안 속 버릴 것 같은 세기말적 조합으로 인해 제법 상했을 방문객분들의 안구 정화를 위하여 내 마음 속 비장의 순수 카드를 꺼내야할 듯 하다. 그 전에 잠깐...
이 영상에 대한 나의 애정을 좀 피력하고 싶다능.
이걸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제법 소녀다웠던(그러나 행실이 그렇게 소녀스럽지는 않았던) 시절의 그 어느 여름날. 그것이 일요일인가, 토요일이었던가. 모두가 외출한 집에서 혼자 마루에 상을 펴놓고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들고 있는 책은 아마도 수학의 정석이었거나 성문 종합 영어였겠지. 그 때 우리 집은 거실이 매우 넓고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어서 매우 쾌적했다. 여름인데도 선선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사소한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그 중딩이 사실은 고전발레의 애호가여서, 지금까지 한번도 드러내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발레고, 발레리나이며, 발레리노이다' 라고, 마치 혼자만의 음모를 꾸미듯 생각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이해(...)를 하는데 조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중딩은 뭐랄까, 명절날 모이면 피아노 치고, 기타 연주하고 노래하는 외가 식구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통기타 시절의 이문세 2집은 줄줄 외고 있을지언정 자기 나이 또래에 걸맞는 대중가요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심지어 독일에 갔다 온 1년 사이, 서태지가 나왔단 말이다. 대체 <나는 그대를 모릅니다>같은 부드러운 노래와 <교실 이데아>사이의 엄청난 갭을 나더러 어떻게 따라가라고!! 한국 대중가요사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여기 없었던 관계로 그 중딩은 그 때까지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동년배들이 아이돌 가수에 열광하는 것 같은, 나이에 맞는 팬질을 해 본 적이 없게 되고 말았다. 조금 아쉽지만 세상에는 그런 중딩도 한둘 있게 마련이라고 믿고 싶다.
뭐, 그랬다. 공부하다 말고 잠깐 TV를 켜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나 쇼프로, 가요 톱10이 아니라 EBS에서 예고도 없이 방영해주던 모종의 프로그램에 눈이 회까닥 돌아가서 리모콘을 든 채로 한 10초쯤 굳었다거나, 그 직후 '이거!! 이런 건 녹화 해야돼!!'라며 테이프를 찾아 주저없이 녹화버튼을 눌렀던 데에는 이런 맥락이 있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것 뿐이다.
물론 그게 내가 아끼고 아끼던 SBS판 슬레이어즈 녹화본이었다는 건 좀 문제였지만.
눈물이 났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난 그 테이프를 화면이 지직거릴 때까지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또 돌려보며 눈과 머리와 가슴 속에 이미지를 눈 감고도 떠올릴 때까지 새겨박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다른 경우 였다면 팬질의 시작이었겠지만, 그때까지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던 중딩시절의 나는 몰랐다. 어차피 그런 광적인 애정과 관심을 공유할 사람도 없었다.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모두 HOT에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견 무조건적이기까지 했던 애정행각은, 어느 날 어린 동생이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슬레이어즈 다음 화를 녹화하느라 그 위에 덮어씌우면서 끝장이 났다. 진짜 문제는 그거였다.
나는 그의 의상과 생김과 동세, 음악, 그리고 그밖에 다른 모든 것은 기억했으나, 이름만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_-)す=33
이건 뭐, 동생을 구박한다고 지워진 테이프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프로그램을 우리나라에서 재방송해줄리가 만무했다. 그 시간에 그걸 EBS에서 본 것 자체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동영상 검색? 개뿔. PC통신 시절이었으니 그런 건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내가 그걸 만화 테이프에 녹화해버렸다는 것이야말로 짓궂은 신의 장난이었던 것이다. 낚시의 기본은 치고 빠지기. 눈 앞에 어른거리게 만들어 놓고 사랑에 빠지면 사라져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것. 미칠 것 같은게, 그 영상의 모든 걸 기억하면서도 이름을 몰라서야 어떻게 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어쩌면 나이에 걸맞게 순수하게 불타오를 수도 있었을 소녀의 마음은, 영악하기가 헤르메스급인 신의 농간에 농락당한 채 입에 마른 갈증만을 남기고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피겨에 대한 내 첫 사랑의 기록이다.
그러니
1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내가 이걸 발견했을 때, 얼마나 감격했을지 상상하실 수 있으려나.
# by 절세마녀 | 2008/03/17 23:17 | 무대뒤편: 야외 공연장 | 트랙백 | 핑백(1) | 덧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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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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