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릭 때문에 TV앞에서 하얗게, 하얗게 풍화작용하고 있던 중딩이었던 바로 그 때, 나는 그를 포함해 동시에 두명에게 깊이 반해버렸다. 사춘기 시절을 급우들에 대한 두근두근한 마음은 커녕 고전이나 읽으며 매우 쿨한 스타일로 보내고 있던 어린 중딩은, 비로소 버닝을 넘어 사랑에 빠질 기회를 잡았으나, 앞서 말했던 대로 녹화분이 SBS판 슬레이어즈 방영분에 지워져버린 바 가슴아픈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꽤 공평하게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쿨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해버린 여자의 이름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건 <뭔가 왕족 같은 느낌에, 아무튼 그 남자보다 길었다!!> 뿐...
그러나 그런 문제가 굉장히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녀의 이미지는 완벽한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타입'으로 머리 속에 이미 각인된 상태였다. 이를테면, 쿨릭이 내게 있어 살아있는 지크프리트, 낭만적 왕자의 프로토타입이었다면
왜 그 때의 그녀를, 흔히 피겨에서 자주하는 표현인 '요정'이라든가, 좀 더 보편적인 이미지인 '공주'라든가, '여왕'이라든가 하는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았는지는 당시에는 크게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하여간 요정이나 공주나 여왕하고는 좀 달랐다. 그러면서도 우아함을 넘어서서 기품이 넘치고, 위풍당당하지는 않지만 감히 범인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여유라는게 철철철 흘러나왔다. 물론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하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아, 음악을 타는 연기라는게 이런거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움직임이 가슴을 때렸달까.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피겨는 동계스포츠가 아니라 예술의 한 장르로 독립해버렸다. 물론 피겨는 스포츠인 동시에 예술이며, 그 때문에 기술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솔직히 씨원씨원하게 쿼드 팍팍 뛰는 남싱들 보면 너무 좋으니까. (좀 신경쓰이는 건 신채점제에서 TES(기술점수) 채점 때 점프를 너무 강조해서...다들 너무 점프 경쟁하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특별히 장난만 안 치면 옛날보다는 그나마 좀 나은 점이 있....후우) 어쨌든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머리 속에서는 이미 프로그램을 하나의 '작품'으로, 4~5분 동안의 연기를 통짜로 받아들이는 편이 몇 배는 익숙하다.
아무튼 그래서 쿨릭을 찾아낸 이후로 희미한 기억의 잔향을 따라, 허기진 승냥이가 먹이를 찾듯 온 네트를 뒤져 발견한 것이
마법에 걸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채 시간에 떠밀려 쇠락해가는 성이 있다. 아니, 사실 눈을 감고 잠든 건 세상이며, 그녀야말로 깨어있는 유일한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담쟁이 덩쿨과 가시나무가 온 성을 둘러싸고, 흘러간 시간을 증명해주는 먼지가 소리없이 쌓인다. 한때 그녀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음과 애정을 주고 받았으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하나둘씩 사라져 이제는 아무도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고요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는 자신이 언어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하기 시작했다. 입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오 왕비님, 나의 왕비님.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답니다.
내가 만약 마법의 거울이었다면 그녀가 묻기도 전에 그렇게 답했으리라. 아니, 물을리 없기에 더 숭배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날 그녀가 그 자신의 고독과 쓸쓸함에 지쳐 위로를 구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겠지.
오, 나의 왕비님, 사랑스런 왕비님. 그러니까 그렇게 슬퍼하지 마세요.
그러나 기실 그녀는 그런 말을 해 줄 거울의 존재조차 모른다. 사실 그녀는 자기가 느끼는 것이 외로움인지, 슬픔인지 혹은 고독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을 한마디 말도 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내가 그녀의 고독을 느낀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슬프고, 어딘가 가슴이 아파서 왠지 내가 울고 싶어지지만, 그래도 그 곁을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아닌. 그래서 발랄하거나 꿈에 가득차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공주는 아니다. 곁에 누가 있거나 없거나 당당하게 은반 위를 평정하는 여왕도 아니다. 요정이라기에는 너무나 인간답고, 그렇다고 평범한 인간이라 하면 누가 될 것 같다. 그녀는 시간에 유폐당해 고독의 성에 잠겨있는 왕비님이다.
미풍에 흔들리는 긴 난초처럼 느려보이지만 사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팔. 음악이 시작할 때 다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감정선을 잡는 여유하며, 마치 음악과 한몸이 된 듯한 물 흐르는 듯한 스텝. 스텝 중간에 뛰어오를 때는 '사뿐히'라는 말도 과하게 느껴질만큼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노을지는 저녁 어스름의 그 푸르스름한 공기라면 모를까. 보랏빛 의상과, 그에 걸맞게 환상적이고도 애잔한 조명. 표정은 말할 것도 없고, 중간중간 연기할 때 클로즈업해서 잡아주는 카메라까지. 특히 마지막의 그거, 그거, 으아아, 으아아아, 으아아아아.
몇년의 세월이 흘러 그녀에게 다시 한번 감탄함과 동시에 '참 끝내주게 일관된 취향을 고수하는구나' 하고 어렸던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고백하자면 두 사람한테 홀랑 넋이 나갔던 그 중딩은 어린 마음에 '저 둘이 같이 하는거 보고 싶다'->'페어로 나왔으면 좋겠다'->'결혼해라!!' 라는 망상을 속으로 부르짖었다고 한다.
G&G라고, 세르게이 그린코프와 예카테리나(별칭 카티아) 고르디바가 한팀을 이루는,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러시아 환상의 페어가 있었다. 이 페어는 온갖 선수권에서 1위를 차지하더니 88년 캘거리,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을 재패해버린 전설의 커플로, 페어라기보다도 천생연분의 연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은반 위에서 피겨로 사랑을 나눴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둘 사이에는 '오해의 근원'인 언어라는 게 아예 불필요해보일 지경이다. 그냥 내가 너고, 네가 나인 경지.
1994 세계 선수권 대회 Vocalise
어린 시절부터 같이 훈련하며서 애정을 다져온 사이라 호흡이 맞는 것은 당연지사고, 개인적으로도 서로가 서로밖에 모르던 엄청난 순정 커플이었다고 전한다. 바람이 불면 날아갓 것 같이 사랑스러우면서도 강단이 있는 카티아를 세르게이가 어떻게 받쳐주고, 그들이 서로를 이끌어주었을지가 고스란히 녹아난 연기에 관객들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1995년, 완벽한 사랑을 나누던 연인을 질투해 죽음의 사자가 그들을 갈라놓았으니, 저 부드러우면서도 듬직한 세르게이를 연습 도중 심장마비로 데려가버린 것이다.
1996 COC 말러, 심포니5번 Adagietto, 예카테리나고르디바
1년 뒤, COC에서 그를 기리는 퍼포먼스를 통해 카티아는 그를 이렇게나마 떠나보냈다. 아마 그녀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기도 했을테지만, 이는 동시에 G&G를 기억하는 팬들을 위한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관객들이 오프닝에서부터 다들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둘이 함께 무대 위에 올라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연인들이 사별이라는 고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만 하는 인간적인 상황에 대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 때문에 말러의 5번 교향곡은 그렇지 않아도 항상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데, 거기다 카티아가 워낙 표현력이 뛰어나서 이걸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 같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표출한 뒤 애써 누르며, 그래도 그녀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 사람은 정말 몸으로 말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여하튼 올릴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이런 퍼포먼스 자체가 흔하지 않을 뿐더러 이걸 빼놓고 그녀를 설명할 수도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올린다.
처음에 올렸던 동영상이 그로부터 대략 일년 안팎의 퍼포먼스라는걸 감안한다면, 그녀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고독해보였던 이유를 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그녀가 요정이 아니라 인간, 사랑을 잃은 젊은 왕비님이었던 이유도.
6년 연하의 멋진 왕자님이 나타나서 열렬한 구애 끝에 성벽을 얼린 얼음과 무수한 가시덤불을 뚫고 그녀를 구해 새 나라로 떠났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게 일전에 말한 일리아 쿨릭이다. 어린 마음에 맘 속으로 커플링을 주선한 적은 있지만 설마하니 2002년에 정말 결혼을 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그 과정이 기적이나 동화처럼 순탄치 않았을 것임은 안다. 실제로 카티아가 재혼하려고 하니 G&G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좀 배신감을 느꼈던지 안 좋은 소리도 많았던 듯 하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해서 그들은 결국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요즘은 딸 둘을 키우면서 미국에서 아이스쇼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Katia and Ilia - Casi Un Bolero
하여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판타스틱한 두 사람. 쇼 앞 부분이 꼭 그 둘 사이에 있었을 법한 '구애와 튕김'이라 보면서 히히 하며 덩달아 괜히 좀 웃었다. 글쎄, 처음에는 줄다리기를 하더니 어느새 말을 주거니 받거니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정말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몸을 겹친다. 그녀가 몸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스케이터를 새로운 동반자로 만나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저, 저, 저, 스프레드 이글에 저렇게 매달릴 수 있다니!! 이건 반칙이야!! 까놓고 말해 너무 부러워!!
불완전한 기억을 더듬어 옛추억을 찾아가는 길에서, 뜻하지 않게 현실에서 펼쳐졌던 사랑과 인생의 대하드라마를 보았다. 그들이 매우 반짝거리던 순간,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으면서도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 수도 없고, 지금처럼 멀리서나마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사실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아버린, 딜레이는 엄청 긴데다 말도 못하는 엉터리 마법의 거울이었던 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 이야기를 옛 동화들이 으레히 써먹던 방법대로 끝맺고 싶다.
카티아 커플 얘기랑 일리야 쿨릭을 따로따로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연결되는지는 몰랐네요- 여기서 고르디바 여사가 촘 많이 부럽습니다...라고 끝내면 전 막장인가요? ^^; 매우 오지랖이긴 하지만, 다른 피겨 커플들도 이렇게 행복한 끝맺음을 했으면 좋겠어요- (스캇 몬난........크흑;)
제목을 제대로 안 읽고 첫 단락을 읽고나서 '어, 혹시 고르디바언니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맘속으로 커플링을 했는데 진짜로 이루어지다니 놀랍네요..^^ 전 처음에 유튜브에서 월광소나타 보고 홀딱 반해서, 지금도 페어하면 G&G밖에 없어요. 다른 팀도 괜찮기는 하지만 정말 어떤 분 말씀대로 엘프의 시대는 가고 인간의 시대가 온 거랄까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