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에서 돌아와서

현장중계야 다른 분들이 더 잘 해주실 거고
전 그냥 뭐...늘 그렇듯이 개인적인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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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 때 우리 집은 학교 옆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그 학교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고, 당시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 묻었다. 나는 그 학교의 모든 교실과 실험실과 어학실과 음악실과 강당과 미술실과 중정과 뒤뜰과 뒷산 등등에 대해 모르는 데가 없고, 학교를 의인화한다면 녀석도 나에 대해 그럴 것이 틀림없다. 우리학교에는 다른 데서 많이 문제가 됐던 폭력 교사 문제같은건 한번도 없었던데다 선생님들이 대부분 열성적이었고(뭐, 히스테릭하고 꽉막힌 사람들은 좀 있었지만 학업에 대해서만큼은 그닥 태클걸 맘이 없다), 자습 문제 같은 경우 다들 설날엔 제발 학교 좀 오지 말라고 문 잠궈놓으면, 학생들이 창문따고 들어가 무리하게 현관을 열다 사이렌 울려서 세콤이 뜨곤 하는(...) 다른 학교에 비해서는 별로 큰 문제가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우리 반 같은 경우에는 왠일인지 급식 영양사언니하고도 대박 친해서 고3때 자습하고 있으면 영양사 언니가 힘내라고 고로케를 만들어 준다거나(...), 신 메뉴를 개발했다며 쉬는 시간에 넣어준다거나 하는, 대학친구 ㅎㅅ이의 말을 빌자면 제도권 하에서 긍정적으로 적응한 매우 천국같은 곳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물론 아침 7시 반 에서 밤 열한시까지의 스케쥴을 별 불만 없이 체제에 딱히 저항하지 않고 수행하는 사람의 경우에 한정해서지만, 여하튼 그 정도의 시간과 생활을 보내는데 합당한 정도의 애정을 나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집 옆의 바로 그 학교를 보면서 아직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딱히 대답할 수가 없다. 건물은 같은 건물이되 같은 학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졸업하고 겨우 3년인가 지나던 해에, 고작 8기 졸업생이 나오고 나서, 우리 학교는 몇년의 난리 끝에 교육청의 강제로 이전당했고, 같은 건물에는 일반고가 들어왔다. 문패만 달라졌다고 추억이 달라지랴마는, 문패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분위기도 달라졌다. 우리집 거실이나 내 방에서 학교가 딱 보이는 위치였기 때문에 난 그걸 좀 확실히 느꼈다. 1학년부터 학생을 받기 시작한 그 일반고는 이전처럼 밤새 불이 켜져있는 일도 없었고, 중정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아이들도 없었으며, 체육대회때 과티를 맞춰입고 개성과 전통(..우리 나름 좀 그런게 있었다 ㅋㅋ)있는 응원을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소중히했던 뒤뜰에 코스모스가 자라는 일도, 원두막에 학기 행사처럼 짚단을 갈아끼우지도, 자매결연 맺었던 농가에서 얻어온 물건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는 일도 없었다. 일단 나부터가 산책하다말고 기웃거리는 걸 꺼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기 있는 학생들은 우리 과도, 내 후배도 아니었고, 같은 건물에 발 좀 디뎌봤다는 것 이외에는 딱히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영혼을 잃자 우리는 연쇄적으로 연결고리를 잃었다. 내동에 새 학교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곳에 동생 졸업식날 딱 한번 가보았을 뿐이다. 새 학교도 집 옆에 있는 옛 학교도, 그 어느 쪽도 내 기억 속의 그 학교가 아니게 되었고, 그래서 나한테 고등학교란 추상적으로 남아있는 아이콘으로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1기 부터 8기 졸업생들은 청소년기의 뿌리를 잃어버렸다.


학교 이전 문제는 딱 내가 졸업할 즈음에 한번 말이 나왔다가 우리가 교육청 앞에서 극렬하게 반대해서 쏙 들어갔었는데, 내 동생이 다닐 때 그 문제가 다시 부활을 했다. 공개적으로야 교육청이 더 좋은 시설을 지어 이전시켜주겠다, 특목고니까 대전 중간에 위치해야 하지 않겠느냐 운운했었지만, 사실 거기에는 왠 국회의원과 지역 유지 간의 알량한 이권챙기기가 내막으로 깔려있던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누구씨가 학교 지으라고 대지를 기부했다는데 알고보면 그 땅 주변으로 다 그 누구누구씨의 명의로 된 땅이었다든가. 학교 지으란 그 부지야 말로 그 동네에서 제일 열악한 산꼭대기였다. 여하튼 그 누구누구씨랑 모 국회의원간 커넥션이 있다든가. 대체 왜 조용히 있던 우리 학교를 건드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선배들이 거의 없어서 방해물이 적고 사립이 아니라서 공권력으로 움직일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특목고라 그랬던 것 같다고 추정된다. 대전에 외고가 두 개나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우수학생들을 위한 좋은 시설...후우...글쎄, 그 부분은 동생한테 물어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더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전 학교는 IMF 직전에 나름 돈 쳐발라서 야심차게 만든 시설이었기 때문에 어디 내놔도 후달릴 것 같지는 않다. 동생같이 집이 통째로 이사온 집 애들이 대박 난감해졌다. 학교를 코앞에 놔두고 봉고차 타고 다녀야 했으니까.


우리 때는 소리지르고 북치고 하는 그 어설픈 시위가 얼추 통했었다. 상대방 논리가 워낙 빈약했을 뿐더러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학교 선생님들, 지역 주민들, 학생들 할거 없이 다 반대했었으니까. 그 때 이전에 찬성했던 건 교장샘뿐이었다. (교감샘은 존재감이 없었어서...기억이...) 교장 샘이 뭐 어떻게 설득해보라고 선생님들한테 지시했던 것도 같은데 어차피 수업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교육청 앞에 가서 시위하고 있었으니깐 뭐. 일단 물리쳐 놓고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이 공권력의 힘을 업은 능구렁이같은 자식들이 몇년인가 있다가 그 문제를 또 들고 나왔다. 이번에는 수법이 더욱 교묘했다. ㅈㅁ동에 일반계 고등학교가 없다는 둥, 그러니까 특목고 저쪽에 주고 이 건물을 일반고로 전용해야 한다는 둥 하며 주민들과 이간질시키더니(저놈의 특목고 때문에 우리 애가 가까운 학교에 못다닌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그게 참 또 웃기는게 원래 일반고 만들 부지는 따로 있었는데 늑장행정처리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일반 커리큘럼에서는 못 쓸 시설도 잔뜩 있어서 더더군다나 어이가 없었던 항목) 이전에 반대하던 선생님들이 대폭 물갈이 되었다. 새로 들어와서 뭘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학부모 회가 두 파로 나뉘었다. 학생들이 몇주씩 등교거부를 했더니 학교 측에서는 출석체크를 해서 내신 불이익에 아주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다. 정책이란 이름을 앞세워 이권을 채우면서 제물이 된 것은 학생들이었다. 앞서 졸업생이 받아야 했던 정신적인 타격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통상적인 말조차 아직도 동생에게 할 수 없다.


지나고 보면 참 별거 아닌데 싶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학교 이전 타결 같은 결론에 충격을 크게 받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깝지만 비교적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때로 절망이라는 건 한순간에 와장창 몰려오는 경우 뿐만 아니라, 반대로 물에 스미듯 습관처럼 화하는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몇년간 나는 내 비정치성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그냥 미지근한 성격이나 취향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곱씹어보니 딱히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서 좀 막막해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침에 나가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인가 나는 사회 변화에 대한 희망을 꿈꾸기 전에 절망과 포기, 외면 그리고 냉소를 먼저 학습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그리고 거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내가 사회 참여적인 가치관을 형성해야 하던 10대, 그리고 20대 초반이었던 어느 날, 순진하고 무력했던 '학생'의 눈 앞에서 자행되고 실현되어버린 불의의 실체화가 아니었을까 하고.


10대를 포함해서 전 연령층의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 촛불문화제(혹은 집회)는 어제(토요일)를 기점으로 공권력은 아예 대강 이리저리 힘빼게 하다가 무력 진압 후 강제 해산으로 가닥을 잡은 듯 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나 오늘 집회 혹은 행진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필사적이라고 해도 될만큼 비폭력을 지향했다. '우리 제발 다치지 말자.' 세상의 어느 시위대가 '목숨을 불사르자' 라는 피의 구호 대신 우리 다치지 말자, 저 사람들도 다치게 하지 말자 라는 말을 하는가. 어제 새벽의 그 소란을 겪으면서 밤을 새고 나온 사람들이나, 나처럼 아프리카 방송보다가 못참고 뛰쳐 나온 사람들, 던파하다 나온 오타쿠씨, 모처의 교감선생님, 버마에서 온 운동가 청년, 수원, 일산, 기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 고딩어 1학년이라 했던 촛불소년, 온 서울 바닥을 삼보일배로 일주한 강달프, 세번이나 후드려 맞았다던 휠체어 탄 아주머니, 역사학과 다닌다는 어느 대학 졸업반 학생,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 교복 입은 중고딩들이 입을 모아 외쳤던 것은 이 빌어먹을 시국에 대한 책임을 정부가 져야 한다는 촉구 외에도 비폭력과 결집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중간 중간 청와대 가야 한다거나, 공격적인 의견이나 행동들도 나왔지만 부글부글 끓어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몇몇은 거리로 뛰어들었다가도 돌아왔다. 분위기가 축제와도 같았던 이전과 달라졌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제했다고. 중간에 언젠가 전주에서 분신자살한 분에 대한 속보가 들어왔을 때, 갑작스레 공동체를 지배한 그 깊은 침묵과 그 침묵 이면에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이 일렁이던 분노를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순간적으로 끌어내려 잠재웠는지 눈으로 보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근데 지금 그런 사람들을 무력으로 밟아?


그 사람들 가진 거 언어랑 촛불밖에 없었어. 그게 그렇게 무서웠냐? 왜, 이빨로 물어 뜯을 것 같았어? 축제로써, 문화제로써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만들어나갈 수 있던 기회를 차버린건 그 외침 앞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무력으로 가로막은 정부 당신들이다. 앞에 나가서 자유 발언 하는거,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거, 그건 대단히 건전한 방식의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거기 나오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정치 성향이나 목적을 숨기고 나온 사람도 있을거고,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때로 선동적인 사람들도 있다. 때때로 여러 다른 모습에 혼란을 느껴서, 나와 같은 생각, 하나의 생각으로 재빨리 모아지지 않으니까 '실망'했다느니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래도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게 과정이지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현장에 있으면 왔다 갔다 하는 말에 이렇게 저렇게 토 달고 싶어지는 마음이 아주 없는건 아니지만 여론 수렴 과정에 잡음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넓은 의미에서 감내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오가는 내내, 그리고 거기 있던 내내 떠올랐던 것은 여기 나와 있었던 10대들에게 위에 언급했던 것과 같은 비겁함을 무의식적으로라도 학습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일 때 패배부터 맛보게 해주고 싶지 않다. 현실논리의 비도덕성부터 납득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 무력감은 의외로 지독하고 강력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조차 포기하게 만든다. 그 애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거를 수 있게, 그래서 자기 생각을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게, 그리고 그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입에 담고 행동하게 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다. 지금도 잘 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 자세를 포기하지 않도록. 바빠서, 나는 관계가 없으니까 라는 이유로 자기 할말을 못하고 참아 넘기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하고 싶다. 간절히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침묵하는 다수가 움직일 필요가 있다. (아, 그래 일단 나부터)


우리는 지금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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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면서 9시 반쯤인가 집회가 의외로 일찍 끝나길래 11시쯤까지 버티고 있다가 하루죙일 걸었던 발이 비명을 지르길래 겨우 들어왔더니...어제 아침엔 청계천에서 밟더니, 오늘은 신촌에서 프락치까지 풀어서 급습해? 생중계 방송 다 잘리고 라디오로만 듣는데, 현장 연결 전화에 '도와주세요!! 다 잡혀갔어요!!'하는 말에 듣다가 혈압올라서 도로 나갈뻔 했다. 나간다고 목소리 하나 더하는 것밖에 뭐 딱히 더 도움 되는건 아니지만. 세브란스 병원에 레지던트에 인턴까지 풀대기라니, 어우, 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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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전개 이해를 위한 기사


(그래도 굳이 찝어서 말하자면 저는 이런 쪽에 동의합니다.)
왜 이글루스에서 이런 여론이 안 나오나 했다.
법이냐, 정의냐의 문제가 아닌 소통의 문제.
촛불시위, 아이들이 만든 판을 망치지 말고 아이들에게 돌려주라
불법시위라. 그럼 경찰의 폭력진압은 정당한가
속지 말자
살수차에 의한 촛불밤샘집회 강제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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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8/05/26 05:56 | 촛불배후: 파라핀 공장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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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5/26 06:1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8/05/26 12:31
하하 멀쩡히 있는 학교를 5년만에 옮기려고 들 땐 뭔가 이유가 있는 법이죠. 당시에는 저 이유가 꽤 먹혔답니다. 우리 애는 저기 못가는데!! 정서도 한몫을 했달까. 익숙해지고 나면 별 문제 아닌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 땐 참 그랬어요.
개인적으로 폭력적 대치상태로 흘러가는 일은 좀 없었으면 생각해요. 혈기 못이기고 일어서자 하시는 분들 가끔 보이고, '저 386입니다'하면서 올라오시는 분들도 보이던데 것도 좀 그렇고. 이미 시대는 21세기인데 집회에서 시위로 넘어가게 되면 갑자기 20세기가 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Commented by 정모씨 at 2008/05/26 06:26
딴얘기가 되지만...전 그학교에서 적응 못한 아이었고^^; 특히나 우리 과는 3대 기피담임 중 2명이나 걸리는 바람에 2년동안 삐걱거렸죠-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건 우리 과부터였는데, 교장선생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텃밭에서 잠시 일탈을 꿈꾸던 애들 몇명이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유일하게 반이 뭉쳐서 준비하던게 합창대회였는데, 음악선생님 취향이 아닌 곡을 끝끝내 골랐다고 상도 못받고....곡을 골라주신 과목 선생님이 합창대회 끝나고 울면서 집에 가시는 바람에 반 전체가 분노에 타오르기도 하고... 으하하-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완전 딴학교네요.
그래서 전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다 끊어버린 것 같아요 추억도 인연도, 학교이전은 거기에 쐐기를 박는 일이었고........학생들이 아무리 저항해도 결국 어떻게 돌아갈 지 뻔했기 때문에 분노하지도 않았죠...이제 그 곳에 대해 생각할때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운동장 담벼락에 자라던 덩굴장미 뿐입니다.
청소년기의 뿌리를 잃었다는 말씀에 정말 동감입니다...저같은 경우는 그 뿌리를 두번 잘랐죠. 내 개인적인 인연을 끊더라도 학교만은 거기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학교마저 없어지니 이건 뭐..........-_- 쓸데없이 냉소와 체념부터 먼저 배워서 전 지금도 둥실둥실 흘러다니네요....지금 이 시위를 바라보고 있는 청소년들 만큼은 그러지 말야아 할텐데;;;

수고하셨구요.......우선은 쉬세요.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8/05/26 12:41
우허허허, 수고는요 뭘. 전 별로 가서 한 것도 없죠.
저도 '학교'에 대해서라면 애정이 있지만 고3때 단체로 종교활동에 빠졌던 '학교애들'에 대해서라면 그닥 뭐 좋은 기억은 아니랄까. 저는 텃밭 가꿀 때는 이마 고3이었던가 그래서 밤늦게 오가며 호박서리를 가끔..., 깻잎도 가끔 따먹고...방울 토마토랑 가지랑 토란도 냐금냐금...혹시 주로 서리해서 좋은 기억인건가! 암튼 합창대회도 힘들고 어이없는 일이 있긴 했는데 그냥 뭐 얼추 잘 넘겨서요. 랄까 전 그런거보다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듯했던 사이비 종교로의 단체 회귀가 충격과 쇼크, 서스펜스였지 말입니다. 여튼 그러셨군요. 토닥 ㅠㅠ 고등학교가 냉소를 학습하는 장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요즘 돌아가는 정세가 참 답이 안 나오네요. 그래도 거기 잘 계시는 거 화이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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