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꿈이...
닥터가, [닥터 후]의 그 닥터가 위험에 처해서 구하러 가야했다. 그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건 이상하게도 나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로즈가 아니었고, 마사도, 도나도 아니어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때, 평범한 아파트인 우리 집에 방문 판애원을 가장한 방해꾼들이 나타났고, 나는 급한 마음에 다용도실 문을 열었다. 다용도실 저 안쪽 문을 열자 10년 넘게 살면서도 있었는지 몰랐던 비밀통로가 나왔다.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길은 자주빛과 보라빛 천개가 잔뜩 달려있고, 바닥에는 칙칙한 페르시안 양탄자가 존재감 없는 여느 카펫들처럼 깔려있는 어두침침한 방이 나왔다. 방 안에는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래형 기계와 계기판이 있었는데 그 방에 위화감 없이 어울렸다.
잠깐 서성거리며 보고 있는데 딸깍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와르르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같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모두 다른 사람이기도 했다. 한 남자의 일생이 한 공간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 남자의 여덟살, 열살, 열두살, 열네살, 열여섯살, 열여덟살, 그리고 스무살의 각기 다른 시점에서 워프한, 다른 나이대의 동일한 남자가 우르르 들어와 시끄럽게 웅성거렸다. 서로를 알아보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음, 좀 어린 나이의 녀석들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내가 그들이 나이만 다를 뿐 완전히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게된 것조차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몇명에게서는 내가 그들을 한눈에 못 알아보는 것을 서운해하는 것이 분위기로 전해져왔다. 어쩌라고, 내 기억에 나는 그들 중 누구 하나도 만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시공을 초월해서 여러 시점의 '나'가 같은 시간에 모인다는 것이 불가능한거 아닌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한자리에 있었다. 닥터가 뭔가 꼼수를 부려놨다든가 했겠지, 싶었다.
내가 아는 닥터에 대한 모든 걸 말해주었다. 우주 어딘가에서 닥터는 위험에 처해있었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그들이 필요했다. 시공간을 넘어서 타임워프를 해야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 안의 기계들은 최첨단이었지만 어딘가 허술하게 고장이 나 내 얼마 안 되는 지식으로로 고쳐야만 했다. 어린 애들은 소파에서 방방 뛰며 놀고, 몇몇은 같이 이야기하고, 또 몇몇은 등 뒤에서 구경하거나, 달라는 도구를 넘겨주거나 하고. 한참 고치다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럼 너넨 거기 가서 같이 돌아다녀?" "...아니."
하고 열 여섯살이 답했다.
"왜?" "글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냥 흩어져."
열 여덟살이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세팅은 같은 시간, 같은 곳으로 떨어지게 해놨는데?" "근데 그렇더라고." "...내가 잘못 고친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스무살이 어깨를 으쓱했다.
"야...그럼 어떡하라고..."
걸어잠근 문 밖에서 방해꾼들이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그런 소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잠깐 손을 놓고 멍하게 있었더니 마음이 급해졌는지 열 여섯살이 얼른 고치라고 닥달을 했다. 그 옆에 서서 "워낙 먼데까지 가야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웃는 스무 살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도 가야하는 거 아냐?" "아니, 누나는 안 가." "왜!!" "쟤들 막아줘야지. 그리고 그냥, 거기 없었어."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려던 차에 스무살이 한마디 덧붙였다.
"하긴, 어쩌면 흩어지는 게 맞는 거였는지도 몰라."
그는 나를 위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열 여덟살만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그 망할 놈의 기계를 고쳤다. 일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실패작이라니. 녀석들은 내가 어떻게 고쳐야하는지, 어디를 틀렸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문이 거의 부서져 갈 즈음, 녀석들이 한데 모여 텔레포트 기기 위에 올라섰다. 버튼을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절부절하며 망설이고 있는데, 열여덟 살이 불쑥 말했다.
"그거, 나 주면 안돼?"
그애가 가리킨 건 내 팔목이었다. 만들어서 걸고 다니던 팔찌를 들어보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팔찌를 끌러 녀석의 팔에 걸어주자니 목이 메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지, 누나?" "그게 아니라, 닥터 옆이 좀 그렇잖아."
답잖게 걱정하는 말을 듣고는 일곱명의 아이들이 웃었다. 그 중 하나, 스무살이 귓속말로 덧붙였다. 괜찮아, 이게 일곱 번째야.
그 애들은 희미하게 웃으며 먼 별들 속으로 사라졌다. 뿔뿔이 흩어진 뒤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 애들이 그 동안 집에 돌아가긴 한건지, 목적지에 한 번이라도 다다랐던 적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스무살, 그 다음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 희소식인지 아닌지도.
어떻게 어떻게 방해꾼들을 피해 달아나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직 세상이 끝나지 않은 걸 보니 그 녀석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금요일 점심에 학교에 갔다. 인문대 아래쪽 연못이 있는 곳까지 걸어 내려갔다. 햇볕은 적당하고 선선하게 바람도 불었다. 거기서 정말 우연히, 이미 오래 전에 만났으나 그다지 친해지지는 않았고, 거의 늘 존재감이 없었거나 과 모임 같은 곳에 얼굴 비추는 일이 없어, 그래서 애써 기억을 헤짚지 않으면 떠올릴 수 없었던 정도의 과친구를 만났다. 여덟살, 열살, 열두살, 열네살, 열여섯살, 열여덟살, 그리고 스무살의 녀석들보다는 좀더 자랐고 선이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 녀석이었다. 나는 그걸 그제서야 알아차렸고, 녀석이 비로소 나를 아는 척하며 아스라하게 웃었다. "너무 친해지면 안 될 것 같았어. 그, 왜, 시간이라는 게 좀 그렇잖아."
나는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숙이니 소리없이 눈물이 나왔다. 아, 너는 나를 얼마나 오래 알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졌어야만 하는 걸까.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어올린 팔에는 얼마 전에 걸어주었던 그 팔찌가 걸려있었다.
이게 전부 너무 졸려서 잠깐 눈 붙였던 15분 사이에 꾼 꿈이야기. 가히 '올해의 꿈' 중에서도 Best에 들어갈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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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절세마녀 | 2008/07/26 23:44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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