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학생 때는 하루에 3편씩 영화를 봤는데, 요즘은 3주에 한편도 보기가 쉽지 않던 차에, 우연히 표가 생겨서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를 보러 갔다. VIP시사회 티켓이었다.


간단 평을 하기 전에 요즘 내 상태에 대해 간략히 적고 넘어가야겠다. 영화 관람에 있어서 요즘 내 상태는..음..한마디로 정상이 아니다. 언젠가 한번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다가 엉엉 울었는데, 그건 영화 내용이 감동적이어서라기 보다도 '내가 그 순간에 영화를 보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 좋아서였다.물론 영화 자체도 좋은 영화였고, 취향에 맞는 영화였기는 한데...'이렇게 좋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편히 앉아 보고 있다니, 젠장 좋다 ㅠ_ㅠ' 이런 느낌?

팔자좋게 하루에 3편식 영화를 보던 시절의 나한테 영화는 예술이고, 작품이고, 누군가의 정신세계고, 이것을 통해 나의 혹은 세계의 어떤 부분을 고양시켜야 하는 자극이고,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가차없이 메스를 댈 수도 있는 그런 것이었는데 요즘은 좀더 가볍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생각없이 웃고, 눈이 즐겁고 - 일상이 스트레스의 연속이 되버려서 그런가 싶어 조금 슬프기는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어쩌면 비로소, 인생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오락거리로서의 영화를 즐기는 대중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물론 그...반응하는 취향은 여전히 narrow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간단히 소감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전지현을 좋아하는지 미처 몰라써..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봤다는 '엽기적인 그녀'를 안 봐서, 내게 그녀는 지오다노에서 양손에 꽃(정우성과 장동건)을 손에 쥔 복받은 여자, 엘라스틴 부동의 헤어모델, 라네즈의 백만불짜리 몸매 광고에서 본게 다다. 긴 머리에 긴 다리로 눈은 반만 뜨고 흐느적거리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이럴쑤가..




그런 것이었다. 오시이 마모루의 어둡고 복잡하고 기교하며 기괴한 애니메이션 배경을 그대로 옮겨옿은데 성공한 그 기괴한 배경을 무대로, 음침한 서스펜스를 돋구는 쪽으로 화려한 영상적 기교를 자랑하는 그 화면을 보면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말하면 코트 입은 전지현이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고 악기라도 맨 것처럼 무기를 등에 지고 등장하는 그 순간부터, 그걸 휘둘러서 말도 안되게 몰려드는 요괴 떼거지를 알곡 털듯 썰어대거나, 괴력으로 조연 여배우를 이리저리 집어던진다든가, 지붕 위를 뛰어다닌다든가, 벽을 뚫고 달린다든가, 기합으로 상대를 날려버린다든가, 음료수 꺼내마시듯 흡혈하는 모습이라든가, 그게 살짝 흘러내리는데 굳이 칠칠맞음을 집요하게 따라가 섹시함을 표현하는 클리셰적인 장면에서 촬영감독이 약간 자제한 듯한, 그래서 오, 괜찮은데? 싶었던 거의 모든 장면에서 하악, 뱀파이어다, 하악, 교복이다, 하악, 칼을 휘두른다, 하악, 아름다운 액션이다, 우와, 엄살이 아니었네, 액션 완전 힘들었겠다, 하악, 이 다음엔 도대체 뭘 보여줄까, 두근두근 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대로 내가 총체적으로 맛이 가서 하나만 딱 꽂히면 대강 관대해지는 상태이긴 한데 이런 반응은 거의 뭐...사춘기 청소년이 된거나 진배 없는 순수한 마음이었다(...아냐, 사실 그 때도 이렇진 않았어...)


그러니까 최종보스 오니겐이 왜 애초에 그 싸움을 시작했는지,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는지, 느닷없는 고백은 무엇인지, 나아가 요괴들의 근원은 뭔지, 협회는 뭔지, 사야는 몇 살인지, 그녀의 심층적인 고뇌는 어떤건지 궁금한건 많지만 그딴 건 영화에서 설명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조연 여배우의 연기가 불안불안 했지만 괜찮아. 적들이 좀 덜 추악하고, 덜 죽었으면 보는데 역겹지 않았겠지만 괜찮아.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의 하나인 코유키씨가 영어 발음이 엉망진창이라 제발 입을 다물고 차라리 일본어를 해줬으면 했지만, 게다가 뭔가 막판은 후다닥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별로 안 괜찮을 것 같지만 난 그런대로 괜찮아. 사야가 아아아아름다우니까.


하지만 각본가(혹은 각색가), 당신은 나랑 싸웁시다. 아니, 각본가의 문제가 아닌건가. 대체 왜 그런거야. 왜 이렇게 열심히 만들거면서 하필 오시이 마모루의 스토리에서 출발한거야. 왜 그랬어..(오시이 마모루는 흥미롭고 장르적 차원에서 의미있는 스토리를 창조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대중적인 의미의 대박가능성과는 좀 거리가...) 물론 전지현의 사야는 멋있었지만. 연기가 뭔지 안다, 는 말하고는 좀 다르지만 카메라가 뭔지는 확실히 아는 연기였다.




덧. 시사회 끝나고 출구에서 모자 눌러쓰고 관람하러 온 장혁을 봤다. vip시사치고 일반인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vip는 vip 맞았던듯.


닫기

by 절세마녀 | 2009/06/05 02:14 | 지하미로:극장개미굴 | 트랙백 | 덧글(17)
트랙백 주소 : http://ladywitch.egloos.com/tb/191420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키르난 at 2009/06/05 07:08
어, 그러니까 전지현과 카메라의, 전지현과 카메라에 의한, 전지현과 카메라를 위한 영화로군요.'ㅂ'
(카메라 뒤에 '감독'을 붙였어야했나..)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06 10:52
ㅇㅇ 이 영화를 보고 전지현을 욕할 필요는 없어요. 아아아름다움..
Commented by 네오바람 at 2009/06/05 08:28
뭐 오시이 마모루 원작이니깐요 ^^ 그나저나 저걸 가지고 야수들의 밤(블러드 소설판) 사서 보는 분들에겐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06 10:52
...보고싶지만 보고싶지 않은 이 아이러니한 마음..
Commented by 네오바람 at 2009/06/06 10:53
보시려면 그냥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ova를 보시면 됩니다. 소설판은 뱀파이어물의 탈을쓴 전공투 정치소설입니당...
Commented by 99 at 2009/06/05 12:07
오시이 마모루 소설 봐도 자세한 설정은 전혀 설명이 안됩니다.

원래 만화 애니 소설 영화 동시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거라서, 애니메이션 보면 이해가 잘 됩니다. 재미는 없지만.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06 10:52
오홍, 그렇군요. 전 ㅇ니는 아직 안 봐서..하지만 역시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아이러니한 기분..
Commented by 조롱이 at 2009/06/05 13:12
전 저거 애니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밤 열두시에 투니버스에서 해주는 걸 봤었지요. 나름 괜찮았어요 ㅎㅎ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06 10:53
투니버스가 안나와서 슬픈1인..
Commented by Jin at 2009/06/05 13:37
....그저 CG가 아쉬울뿐....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06 10:53
CG야 뭐...사실 적이 너무 추해서 그 부분은 좀 보기 싫었어요 ㅠㅠ
Commented by 로드폴드 at 2009/06/05 20:02
시사회;? 음; 엄청난 곳에 다녀 오셨나봐요; 그러고 보니 전 연예인 구경해 본적이 없는거 같습니다;; 아니 군대 있을 때 그 뭐냐 군인들 나오는 TV프로에서 딱 한번 본적 있군요;;; 그것도 아주 멀리서 사람의 몸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요;;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06 10:54
ㅎㅎㅎ, 전 시사회 하루에 ㄷ탕씩 뛰던 적도 있는걸요. 학생떄..
Commented by 동굴아저씨 at 2009/06/06 02:23
그냥 만화책이 스트레이트로 이해가 되던대요?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06 10:54
그렇근영..
Commented by 블러드시사회 at 2009/06/11 02:20
어 정말 장혁왔었어요???????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06/12 00:42
네, 평범하게 청바지에 티셔츠에 베레모자 쓰고 왔었죠. 그리고 표표히 왔다가 껄렁껄렁하고 평범하게 가던걸요.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rss

skin by 이글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