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한 페이지가난한 해적 선장 이르반의 수난 2부 :1-3 옆에서 이르반이 성마르게 씩씩거리거나 말거나, 벨라루스는 입가를 씰룩거리더니 이내 못 견디게 웃기다는 듯 파안대소했다. 한 손으로는 난간을 붙잡은 채, 귀부인들의 예법대로 들고 있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는 것조차 잊고 허리를 접고 깔깔거렸는데, 그 모양새가 더한층 이르반의 심사를 긁어댔다.
딱히 그런 부분을 신경 쓸 인물은 아니었지만.
"웃지마!!" "아하하하, 인간적으로, 하하하, 어떻게 안 웃고 배기라는거야." "꼭 이런 때만 인간적인 척 하지 말고, 그만 웃어 좀."
가까스로 입술만 부채로 가린 그녀-그래도 입꼬리가 올라와서 웃음을 눌러 참고 있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는 이 모든 예기치 않은 사태를 불러온 장본인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에스파냐 출신이었고, 에스파냐 재무대신의 총애를 받는(혹은 받았던) 남자의 현재 처지가 어떻든, 잘 해두는 건 나쁘지 않으니까. 그런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음흉한 시선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세비지, 그렇다면 당신도,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열성팬'을 다시 말한들 달리 뭐가 될거라 생각하지는 않소만." "그러니까 그 '열성팬'이라는 걸 다시 말하면, 말이죠..." "말했잖소, 팬은 그 자체로 순수할 뿐이오. 그다지 작가 자신에게 반한 것도 아니고, 그가 반한 대상에 반한 것도 아니고, 물론 당신 등 뒤에 서있는 알프레도군은 참 귀엽고 애처롭기 그지없소만, 뭐랄까, 나는 정말 순수하게 타오르는 무엇인가를, 내가 내 인생에서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렸고 그리고 찾지 못해 헤메이던 것에 대해 그는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하고 있고, 동시에 솔직하고 너무나도 진솔하게 쓰고 있다는 것을 존경할 뿐이지.." "그러니까, 세비지..." "정말이지, 나는 남색가가 아니란 말이오!"
옆에서 이르반이 '나도 아냐!!'하고 절규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답지않게 몇 번이나 말을 가로막힌 벨라루스가 하려던 말을 마저 끝맺었다.
"...전 단지 당신이 다음 권을 기다리는 독자들 중 한명이라고 생각한 것 뿐입니다만?"
능력있는 사령관답게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세비지가 흠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그리고는 누구라도 매혹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중저음으로 말하기를,
"오, 그저 기다린다기보다도...열망하지."
세상을 떠돌고 있는 1권들을 몽땅 다 태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던 이르반과는 별개로, 벨라루스는 순수한 열성팬을 자처하는 세비지에게 진지하게 제안했다.
"지금까지 본 것과 앞으로 볼 것들에 대해 눈감아 주신다면, 대신 당신이 원하는 걸 드리지요." "그게 뭐요?" "당신이 익히 탐낼만한 것이죠."
부채를 한쪽으로 꺾고, 남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듯이 덩달아 조용하게 목소리를 깐 그녀가 말했다.
" <사랑하는 알프레도에게> 제2권 초판 양장본 1호." "......" "극비리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그 양장본은 넘버가 매겨진 한정판으로 제작될 예정이지요." "......" "거기에 저기 널부러져있는 멍청하고 열정적인 작가의 싸인까지 첨부해서, 어때요?"
그리고 그 멍청하고 열정적인데다 제법 순수한 팬까지 거느린 베스트셀러 시인 겸 해적은, <그런걸로 되겠냐. 아무리 그래도 세비지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냐?> 싶은 마음에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일어나 마음 속 밑바닥부터 벨라루스를 비웃어줄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약속한거요." "어머, 사령관님도 참. 저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답니다. 호호호."
어느새 둘 사이에는 왠만한 계약서를 능가하는 굳건한 악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장면에 이르반은 약간의 배신감마저 느꼈으나,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벨라루스는 의리라든가, 정의 같은 것을 눈꼽만큼도 중요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적이 의리와 정의를 따지는 것도 우스웠지만, 그래도 나는 네 이름을 팔아서 재미 본 적이...둘...세 번 정도밖에 없었는데...잠깐, 애초에 이게 다 네가 멋대로 시집같은 걸 펴내서 벌어진 일이잖아!!
"음? 왜 싸구려 바바리안식 감자 스프 같은 걸 먹은 얼굴을 하고 나를 봐?" "보고 있자니 마음이 허탈해져서..." "왜? 말로만 듣던 정경유착을 눈 앞에서 목도한 서민의 마음?" "그것도 그거지만." "그럼 손자의 밀주거래 현장을 포착한 퇴역 장교 할아버지의 기분이라든가?" "아냐, 그것보다 좀더 심각한 건데..."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을 이었다.
"그쪽 둘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사랑이 다 그런거지
뭘 또 그렇게까지
"네가 이해할 정도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으면 그게 사랑이겠어?" "이상하게 엮지마. 너희가 하는 짓의 어디가 어떻게 사랑인건데." "세비지는 네 시집시리즈를 사랑한 나머지 이 자리에 서있고, 나는 그밖의 많은 것들을 사랑해서 여기에 있지." "남의 편지를 일언반구도 없이 시리즈로 엮지마! 그리고 네가 사랑하는 건 돈 뿐이잖아!"
돈은 그 많은 것들 중의 일부일 뿐이라며 벨라루스가 검정색 레이스 부채를 살랑거렸다. 대화의 밖에서 특별히 끼려고 노력하지는 않은 채로, 앞으로 구하게 될 대상을 상상하며 흡족한 미소를 떠올리던 세비지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는 성격대로, 그는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나 사실은 의아해해야만 했던 부분에 대해 벨라루스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만약을 위해서 하는 말이긴 한데.. 구할 수는 있는거요?" "물론이죠. 세상에 이 벨라루스가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란 없으니까요."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벨라루스가 돌아섰다. 잘 마른 나무 계단에 부딪히는 그녀의 드높은 힐 소리를 모든 이들의 시선이 따랐갔다. 그녀가 선수루에 올라서자 때마침 태양빛이 값비싼 헤어핀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그러나 역시 가장 눈부신 것은 보는 이들의 근심걱정까지 다 날려버릴만큼 상쾌하고 자신에 찬 미소로, 그 순간만큼은 저 청명한 하늘에서 불타오르는 태양과 그녀 중에 누가 더 빛나고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자, 여러분!"
일생 한번도 패배해 본 적 없는 연설가처럼 자신만만한 얼굴로 양 팔을 활짝 벌리며 벨라루스가 선언했다.
"<해적출판호>에 승선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덕질도 사랑은 사랑이죠. 일방도 짝사랑도 아니고 무의미한 방향이라 그렇지..
어쨌거나 흰비얌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어느새 해적출판호가 출동하게 되었슴미다.
그런거임, ㅉ
# by 절세마녀 | 2009/06/24 01:35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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