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해보는 모자 열전 3 : 빨간 모자를 보았니?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착하지만 귀얇고 덜떨어진 꼬마아가씨 빨간 두건에 대해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hat과 cap사이에도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거늘 두건과 모자 사이에는 한 10광년쯤의 차이가 있단 말이지. 그리고 그 모자들도 형태와 재질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내 취향은 주로 클래식하면서도 쓰기에 가볍고, 색상이 화려하며 챙이 넓은 쪽이다. 그 우아함에 가격 또한 참으로 高上해지지만(..) 그거야 뭐 취향이니까 감수할 수 있는 문제라치고. 하지만 간혹 챙이 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사지 않을 수 없는, 그래, 마치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처럼 손에 들린 지갑 뿐만 아니라, 내 영혼의 지갑까지 홀랑 털어가버리는 그런 자비심 없고 발칙한 모자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게는 주로 빨간 모자들이 그런 만행을 저지르곤 하는 것이다 OTL



니스에서는 모자가 꽃처럼 핀다

프랑스가 좋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평범하게 아침을 먹고 골목을 걷다가 저런 모자 전문 부띠끄를 심심치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일이나 이탈리아 정도만 가도 길거리에서 평범하게 모자가게를 만나기보다는 명품이나 브랜드샵에 곁다리로 끼어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때는 2006년, 세상의 끝에서 프랑스 남부의 니스로 탈출 했던 그때, 나는 그저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바닷가로 향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면 저런 부띠끄에서 발목을 잡혀 반나절을 날리곤 했던 것이다. 모자가 화려하다고 가게가 화려한 것은 아니라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평범한 가게라고 생각하고 슥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유독 저런 것만 잘 보이는 내 더듬이를 피해갈 수는 없는 법. 아니, 엄밀히 따지면 가게는 가만히 있는데 내 더듬이가 그걸 피해갈 수 없었던 거지...


여하튼 그 니스에서 며칠 빨빨거리고 싸돌아다니다가 막 깐느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기차시간도 다가오는데 마지막으로 구시가지에서 기념 선물이나 사둘까, 하며 캐리어를 끌고 가다가 발견해버리고 만 이 집...


할렐루야.
만세.
이것으로 나는 니스에 온 목적을 다 초과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 모자를 사기 위해 세상의 끝에서 도망쳐나왔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만큼.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모자와 그 위에 위에 왼쪽의 하늘색 모자는 내가 한번 손에 들었다가 그냥 쓰고 나와버린 빨간 모자와 모양이 같은 쌍둥이다. 그녀석들 뿐만 아니라 저 벽면 가득 넉넉한 챙과 큰 리본이 달린 모자들을 보라. 어찌나 우아한지.

그리고 지금 사진을 다시 보니...
그 때 내가 왜 고작 하나를 고르느라 고민을 했는지 알수가 없고...ㅠㅠㅠ



어쨌거나 한번 썼더니 머리에 붙어서 벗어두고 나올 수 없었던 이 빨간 모자. 마찬가지로 여행경비의 1/5쯤을 모자값으로 지불했지만 어쩌랴.
이미 내 마음은 모자에 핀 장미꽃처럼 활짝 ㅋㅋㅋ

모자 색깔이 너무 튀어서 다른 옷에 맞춰 입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을 듣기도 했었는데, 사실 빨강 자체가 느낌이 강렬해서 그렇지 누구나 빨간 옷 한벌 쯤은 있을테니 그닥 매치하기 어려운 색깔은 아니다.

[바다는 바다인데 니스가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바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어딘가 골목]


이렇게 잘만 쓰고 돌아다닐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ㅋㅋ

한동안 저 빨간 모자에 심취해서 스페인 여행 다니는 내내 쓰고 다녔다. 모자가방이 없어서 머리에 올려놓고 다닌 거라고 변명해봤자 아무도 안 믿겠지. 여행 중에 접히지 않는 모자란 번거로움의 결정체 그 자체인데 그래도 꿋꿋이 썼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 한 장면을 위해서였지.


[바르셀로나, 구엘공원]


지나가던 현지인으로부터 예술대학 학생이 퍼포먼스 하러 온거냐는 질문을 들었던 이날의 패션. 아니, 전 그저 지나가는 여행객일 뿐인데영. 어렸을 때 독일에 살 때 어쩌다보니 스페인을 못 가보고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이후에 그곳에 다녀오신 부모님께서 내내 '바르셀로나, 가우디, 바르셀로나, 가우디'하시는 바람에 말은 안했지만 살짝 약이 오른 채로 고등학교 졸업만 하자고 생각한 것이 벌써 몇년. 나는 내 나름의 예장을 차리고 에스파냐가 낳은 최고의 건축예술가, 가우디의 자취를 즐기러 갔다. 곁의 로제와인은 비로소 가우디의 천재성과 조우하게 된 나를 위한 축배요, 붉은 깃펜은 그것을 기록하고 전하기 위한 외경이고, 거기에 화려한 꽃다발과도 같은 빨간 모자가 함께 했으니...나는 그저 살짝 취해서 구엘 공원을 걷던 저 때의 내가 또다시 부러울 따름이다. ㅋㅋ


by 절세마녀 | 2009/10/13 22:49 | 드레스룸: 흰색 화장대 | 트랙백 | 덧글(6)
트랙백 주소 : http://ladywitch.egloos.com/tb/195830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와아 at 2009/10/14 01:29
멋지세요.. 제대로 각도(?) 나오시는 모습인데요 마지막 샷.. 정말 여유롭게 자유롭게 스페인의 예술혼을 만끽하고 오신 듯 합니다... 잘 어울리세요..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10/21 01:40
호호, 감사하니다^^
스페인에 가니 저러고 다니고 싶더라고요 ㅋㅋ
Commented by 키르난 at 2009/10/14 08:58
맨 마지막 사진은 정말로 그림 같은 사진;이군요. 제 옆에 놓인 밀크티로 가우디를 위한 축배를!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10/21 01:40
그쵸. 저도 저 사진 참 좋아해요^^
말씀들으니 밀크티 마시고 싶어지구 ㅠ
Commented by 동굴아저씨 at 2009/10/16 13:18
빨간옷과 모자가 잘 어울리는 마녀님.
그대는 이미 모자레벨(?) 만렙.
Commented by 절세마녀 at 2009/10/21 01:40
ㅎㅎㅎ 만렙!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rss

skin by 이글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