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데스 in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 2 창작: 상상의 서고


좀 더 끄적여 봤습니다.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왕은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지하 세계에서는 딱히 급할 것도, 급하지 않을 것도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재거리며 청을 올린 자의 마음이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지상과 지하에서의 시간의 흐름은 많이 달라서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흔히 저승에 영원한 고통의 형틀이나 영원한 낙원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는 것을 왕은 잘 알고 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저승은 숨 쉬던 모든 자들이 최후에 당도하는 곳이자, 지상에서 주어진 시간을 모두 쓴 자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이었다. 여분의 시간이 남아있더라도 왕 앞에서 자신을 소명할 수 있을 한 두 마디 정도의 숨이 남겨질 뿐, 나머지는 스틱스의 강물로 흘러들었다. 시간은 금세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축축해졌고, 그렇게 묵직해진 기억들은 천천히 흘렀다. 거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모종의 판결을 마치고 나면, 왕은 망자들에게 적절한 세계를 허락했다. 그러면 그 자의 시간은 스틱스와 함께 아주, 아주 느려졌다. 그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시간은 이내 흐르지 않게 됨으로써 동시에 영원에 가까워 졌다. 그래서 최후의 순간에, 어떤 자리에 어떤 기억을 가지고 설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자리는 천국이 되기도 했고, 지옥이 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영원한 기갈에 시달리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영토에서 무한히 춤을 추든, 불에 타든 그것은 그들 자신의 몫이었다. 그것이 지상의 존재들과 망자들이 극명하게 다른 부분이었다. 망자들도 산 자들과 마찬가지로 매순간 존재했다. 다만 존재할 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무한히 늦추어진 시간 속에서 살았다. 시지프스는 자신이 끝없이 돌을 굴리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왕이나 왕에게 속한 몇몇 관리자들이 보기에 그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있는 그 순간 이외의 다른 순간들을 기억하지조차 못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갈 만큼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매순간 새롭지만 변하지 않는 자들. 영원히 무한한 찰나의 순간들. 그것이 저승에서의 시간이었다.


   왕은 때때로 궁금했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서 이렇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나는 무엇인지.


   왕에게는 형제들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큰 형은 올림푸스의 머리맡에서 빛나는 드높은 하늘과, 작은 형은 거칠게 파도치는 푸른 바다과 사랑에 빠졌다. 아마도 맨 처음, 세상의 시작부터. 최근에는 여인들과 혹은 여신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불미스러운 사고를 친다지만, 어떤 의미에서 하데스는 그들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형제들이 가장 사랑한 것은 바로 그 하늘과 바다, 그것이 전부여서 나머지 것들은 다 시간을 때우기 위한 진지한 장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초에 자신이 원한 것을 가지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지난한 세월 끝에 그것을 독차지했다. 때때로 원성이 이 깊은 곳까지 들려왔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왕은 형제들이 살아있음을 자기 방식대로 즐기고 있을 뿐인 거라 생각했다.


   형제들이 제각기 자신이 차지한 곳을 자랑할 때, 왕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말하자면 저승은 삼계의 모든 영들이 모이는 곳인 만큼 지상과 그 위의 더 높은 곳을 합친 것보다도 넓었다. 한계가 없는 곳이라 수평선이나 지평선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 그였으나, 왕은 그에 대해 자랑하거나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의 따뜻함 같은 것은 없었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파도의 노랫소리는커녕, 멈춰있다시피 한 스틱스가 무지근하게 땅속을 파고들어가는 기괴한 울음소리만이 긴긴 시간 동안 들려왔다. 수십,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주 고약할 정도로 변하는 것이 없는, 형제들의 표현에 따르면 ‘적잖이 심심한 곳’이었다.


   타고난 욕망이 적었던 탓에 저승을 돌보고 있었지만, 하데스는 가지고 싶은 것이 거의 없었다. 원하는 것도 없었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고 그것을 꼭 그 순간에 손에 쥐어야만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형들이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치르곤 했던 전쟁에 질려서인지도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기간테스와 싸우는데 끌려 다니곤 했던 나날들은 다시 떠올려도 정말 지긋지긋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그런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냐고, 이 단조로운 세계가 내게 떠맡겨졌으니, 반대급부로 나도 원하는 것을 가져야하는 것이 아니냐 다그칠 수도 있었다. 능수능란한 협상의 대가 헤르메스라면 애저녁에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생명이 붙어있는 것 중에 왕이 최종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 같은 것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어차피 모든 것이 저승의 문턱을 넘을 것이고, 왕은 모든 것들의 최후를 거두는, 내정된 승리자였다. 그래서 그는 ‘갖는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르페우스, 그자가 찾던 자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하데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기억을 더듬다가 일방적인 대화의 흐름 속에서 낯선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얼핏 둘러보았지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근처에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Eurydice- "


   저승에 있기만 하다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누구든 찾아갈 수 있었다. 수많은 죽음이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드넓은 곳에서 가장 실질적이고 유용한 왕의 권능이기도 했다. 같은 철자, 같은 이름이 아무리 많더라도 하데스는 항상 원하는 자의 앞에, 정확하게 나타날 수 있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감고 이름을 속삭였다.


   끝을 향하여 당도하는 이들을 다스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살아있을 때 발버둥치던 자라도 제 앞에서는 모두 순종적으로 고개를 조아렸고, 아무리 목청이 큰 자라도 그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권위는 철저한 무심함과 그로 인한 공정함에서 기인했다. 큰 형 제우스는 이따금씩 그를 만나면, ‘오오, 나와는 다르게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공명정대한 왕이시여’라며 빙글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혀를 차며 덧붙이기를,

   “그렇게 수도승처럼 살면 퍽 심심하지 않더냐?”

   하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으니. 일이 있어서 이곳에 있었고, 필요로 하는 자들이 청하여 결정을 내렸다. 그런 식으로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나머지 누구나 자신이 처음부터 이것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대해오자, 언제인가부터는 자신이 이곳을 정말로 원하고 좋아해서 있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여겨졌다. 때문에 그 자신도 이런 생각에 끝이 있을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하데스가 이름을 부르고, 눈을 떴을 때, 그래서 눈앞에 전혀 예상외의 존재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였다.








뭐, 상상은 자유이지마는,
일단 제우스는 왕년의 레오나르도, 포세이돈은 킬유어달링의 데인 드한, 하데스는 메이즈런너의 토마스 생스터 비주얼이라고 생각하고 썼습닌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는 좀더 우람하고 권위적인 르네상스 시대 조각상 같은 이미지였지만, 쓰다보니 인간세상 모랄 따위 개의치 않을 듯한 올림푸스 3형제의 느낌이라면 이쪽도 신선하지 않을까 하여.









덧글

  • 키르난 2015/03/15 17:07 # 답글

    묘...하긴 한데.....
    그리스로마 신화는 여러 창작물이 많다보니 이미지가 뒤죽박죽입니다. 그래도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에 대한 가장 강렬한 이미지 형성은 엉뚱하게도 일리야...였나, 하여간 에이스88시리즈에 실린 그리스로마신화 쪽이었고, 다른 하나가 일본의 모 만화책이었더랬지요. 후자는 하데스가 남자주인공이고 악역이 제우스였던지라 페르세포네를 두고 삼각관계 비슷한 것을 형성하던데.. 덕분에 제 안에서도 하데스는 '조카를 납치해 아내로 삼은 로리'가 아니라 진중하고 차분하여 땅속 세계와 지하 세계에 잘 어울리는 인물..;; 그런 이미지에도 지금의 하데스가 꽤 잘어울립니다. 다만 제우스나 포세이돈과 사이가 좋다는 것이 조금 다른 정도? 제 속에서는 권력을 두고 다투는 형제들 정도의 느낌으로 그리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은 분위기..=ㅁ=

    확실히 본문에서 지적하신대로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자식은 양손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데 하데스는 기억나는 것이 몇 없군요. 페르세포네와의 사이에서 있었던가요../ =ㅁ=
  • 절세마녀 2015/03/24 00:55 #

    하데스는...개망나니 같은 형들 사이에서 자라 출연 지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병크가 적죠.
    물론 페르세포네를 납치한게 워낙 파격적이긴 하지만.

    저는 특히 베르니니의 조각들 때문에 거의 늘 잘생긴 떡대 이탈리안 아저씨들로 상상하다가, 어느날 문득 여리여리한 금발 3형제를 캐스팅하면 어떨까 했는데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하면서도 ㅎㅎㅎㅎㅎㅎ 후후후후후후
  • 크림 2015/03/17 14:36 # 답글

    제우스는 동감합니다만 제 안의 이미지로서는 포세이돈이 좀더 생스터 쪽이고 하데스가 좀더 데인드한 쪽이네요. 여튼 좋은 삼형제라는 점에는 차이가 음슴미다(...) 항상 미중년의 이미지로만 상상했었는데 이런 것도 신선하네예....
  • 절세마녀 2015/03/24 00:53 #

    그치, 떠올려서 구도 짜놓고 나니까, 이게 또 은근히 매력이 있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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