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꿈
2009/07/04   오래된 이야기
2009/05/21   여행을 떠나다... [19]
2008/12/07   연아가 우승하는 꿈 꿨다 [8]
2008/07/26   어제 낮잠이 준 최고의 꿈 [16]
2007/06/29   요즘 꿈은 대체 왜 이러지 [10]
2007/04/06   꿈 이야기 [4]
오래된 이야기
꿈에 옛친구가 나왔다. 한, 5에서 6년 정도 전의 내가 익히 알던 모습을 하고, 언제부턴가 놀러오지 않게 된 우리 대전쪽 집 거실이 마치 자기 집인양 편안하게 앉아서 놀고 있었다. 나는 왠지 반갑고 그리운 마음에 맛있는 걸 해주겠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먹을 걸 사러 집 앞의 마트에 가려고 나왔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것들을 한아름 집어 사들고 오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수천번은 오갔을 그 길에서 영영 치유되지 않을 낯섦을 느꼈다. 눈 앞에 뻔히 집이 보이는데도,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우는 다섯살박이 아이들처럼 어떻게든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 헤메고 또 헤메다가...그러다 양손 가득 먹을 것들이 든 비닐 봉다리에 팔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파오는 바람에 깨어났다.

[네버엔딩스토리] 가사에는 하도 비문스런 부분이 많아서 따라 부를 때마다 닭이 되버릴 것 같은 기분에 별로 즐겨 부르지는 않았지만, 한 부분만은 진짜 보석같은 구석이 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거기, 거기는 진짜, 진짜다.

by 절세마녀 | 2009/07/04 23:11 | 레테의강: 흐르는 일상 | 트랙백
여행을 떠나다...

떠나자. 나는 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열심히 짐을 싸고 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눈치를 주고 있었지만, 있는대로 보아 넘기며, 그래도 꿋꿋이 짐을 쌌다.


목적지는 런던.


왜 하필 런던이냐고. 독일에 내리 살 때도 건너갈 생각을 하지 않던 영국이 아닌가. 어쩌면 직전에 케이블에서 본 나니아 연대기가 좀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판타지 어드벤처'의 '어드벤처'에는 '여행'이, '판타지'에는 '영국'이 한 쌍을 이룬다...고 내 무의식은 연결짓고 있는 모양이다. 마치 예술의 도시=파리, 유적의 도시=로마인 것처럼.


다시, 목적지는 런던.
하늘는 우중충하고, 음식은 대따 맛없는 런던.


돔군과 주고받기를, 영국인들이 한때 바다를 재패했던 것은 분명 영국땅 그 어디에서 먹는 음식보다 선상에서 배급되는 식사와 약탈지의 음식이 더 월등하게 맛있엇기 때문이다, 눅눅한 피시&칩스 따위를 대표 음식으로 먹다가 드디어 '맛'이라는 것에 눈을 떴겠지, 그러니까 결국 후추를 털겠다고 인도를 턴 것은 당연한 수순이야, 인도에는 미안하지만. 하지만 제이미 올리버가 있잖아요!, 그 사람은 이탈리아 음식을 했다구!, 이태리 요리만 한건 아니잖아요!, 어쨌건 그건 영국 음식이 아냐!..그런 농담이 가능한 나라.


푸르지만 어딘지 음침하고 습한 공원이 여기저기 있는데, 그 공원의 까마귀들은 왠지 마법에 걸린 신사들이 뒷짐지고 까딱까딱 걷는 것처럼 보이는 기묘한 영국식 판타지. 왕가가 있고, 티타임이 있고, 셰잌스피어가 있고, 닥터가 있고, 로얄 발레단이 있고,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워터하우스의 그리스 신화 연작들과 그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의 중심인 런던.


그리하여 나는 아무렇게나 구겨넣은 짐가방을 챙겨들고, 이미 생활의 무게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발을, 정신을 잃은 고등어 두마리처럼 죽은 것 같은 이 두 발에 없는 오기를 다 불어넣어 내디딘 끝에, 비행기로 십여시간을 날아 마침내 런던 상공에 다다랐다. 비가 내리지 않아도 역시나 푸르스름한 하늘빛. 열릴리 없는 창밖으로 다가오는 비 내음이 왠지 맡아질 것만 같고, 비행기는 서서히 몸체를 숙여 그 땅에 익숙하게 안착했다.


이제 곧 내 두 발로 저 땅 위에 서면,
내 폐여, 너는 여행의 자유로운 공기를 만끽하리라.
내 손이여, 너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들을 쓰리라.
그리고 내 심장아, 아름다운 것들을 향해 다시 뛰어라.

















...깨어보니 출근할 시간이었다...

것도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할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아, 젠장. 이 날은 회사 가기 진정 싫었어..ㅠㅠ



나중에 들은 하이디가 말하기를,

"그니까, 언니는 꿈에서조차 런던에 가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거지ㅋㅋ"

아, 잔혹한지고 ㅎㅎ
.


by 절세마녀 | 2009/05/21 23:51 | 레테의강: 흐르는 일상 | 트랙백 | 덧글(19)
연아가 우승하는 꿈 꿨다

자취방에는 TV가 없으니 대전집이었던 것 같다.

옆에서 엄마가 사과를 깎고 있고 동생이 삐뚜름히 누워서 그걸 낼름낼름 받아먹고 있는 가운데, 무심히 TV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대형 HDTV 화면에 연아가 그득하게 잡히는 것이었다. 나는 기겁을 하면서 '아 맞다 그랑프리 파이널이잖아 내가 정신이 나갔나!! 왜 집에서 드라마 재방송같은걸 보고 있었던거야!! 악, 결승전을 놓치다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라고 왜치며 살짝 패닉상태에 빠져 화면에 집중했다. '죽음의 무도'가 아니었으니까 LP였을텐데, 내가 꿈 속에서는 그걸 '세헤라자데'라고 생각했지만 깨고나서 생각해보니 '세헤라자데'가 아니었다. 음악도 안무도 달랐어! 그래, 사실 내가 그 안무가 좀 맘에 안 들었거든. 죽음의 무도는 정말 죽음인데.


여튼 앞에 여러 선수가 거쳐간 탓에 빙질은 우둘투둘하기 짝이 없었고, 정빙을 안해서 그런지 꿈이라서 그런지 한쪽에는 살짝 물결무늬 주름마저 잡혀있었는데 빙연은 뭘하는건지(읭?). 문제는 그렇게 투덜댈 생각이 달아날 정도로

연아가 예뻤어...
(죽음의 무도 화장이었거든..)

의상도 달랐다. 그랑프리를 위해 깜짝쇼를 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갈라쇼인지 살짝 오락가락 할 정도로. 물론 조명이 없었으니 갈라쇼는 아니었겠지만. 검정색 벨벳 위로 크리스털 비즈같은게 대각선으로 물결무늬를 그리며 전신을 감싸는 바지의상에 붉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깨고 나서 떠올려보니 그렇게 막 예쁜 의상은 아닌데 여튼 연아가 입고 있어서 그랬는지 내가 맛이 가서 그랬는지 그렇게 깨는 의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긴 팔다리가 강조되고 스모키화장이 화사한 강렬함에 정점을 찍었다. 연아가 죽음의 무도에서 팜므파탈적 '여왕'의 면모를 과시하긴 했지만 상당히 건전하고 정직한 압도감이었던데 비하면, 이쪽은 '팜므파탈'적 여왕에 가깝게 섹시했다. ㄲㄲㄲ


프로그램은...우와, 장난이 아니었다. 스핀이고, 스파이럴이고 속도가 엄청 빨랐는데 흔들림이 하나도 없지 뭐임. 심지어 비엘만 스핀 초반부 동작에서 아까 말한 그 까만 까마귀의상이 마술처럼 벗겨져나가더니 핑크와 보라색이 부드럽고 깜찍하게 섞인 스커트 의상이 속에서 톡 하고 튀어나오는 거였다. 짱짱하게 얼어있던 겨울여왕이 사랑에 빠져 봄을 불러온 것처럼. 트라우마에 빠진 왕늠, 이걸 어떻게 넘겨먹나 하고 요리에 골몰하던 세헤라자데가 천일이 지나고 다시 보니 이 왕이 (그니까 트라우마만 빼면) 꽤 괜찮은 인간이란 걸 깨닫고 사랑에 빠지듯이, 혹은 단순히 오데트를 골려주기 위해 아버지 로트바르트를 도와주러 무도회에 간 흑조 오딜이 지크프리트한테 진심으로 반해버린 것처럼. (꿈이라 그런지 완전 내 취향에 직격하는 안무에 캐릭터 해석이기도 하고 ㅎㅇㅎㅇ)


그리고 정말 사랑에 빠진 여자아이에게 반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리.


다들 숑가서 보고 있는데 어쩜 점프에 실수도 하나 없었다. 이걸 뤙엣지 판정을 내리면 심판생활 접어야 하도록 이견의 여지가 없는 엣지에, 내가 늘 마음만으로 염원하던 걸 어떻게 알았는지 강수진씨한테 사사받고 온 것 같이 부드럽고 우아한 팔놀림, 오오, 저 스텝, 오오 저 스핀, 오오오 완벽하게 무결점 퍼펙트였어. 레전드였다고. 평소에는 깽깽이같이 시끄럽던 중계석도 숨을 죽였고, 이해할 수 없지만 스브스의 카메라워크마저 무슨 뽕을 맞았는지 레전드급이었다. 하지만 저 영상을 다시 보려면 ESPN으로 찾아가야 하겠지...를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 프로그램이 끝남과 동시에 기자석과 VIP석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곳에서 꽃과 인형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랑프리 파이널의 피날레에 걸맞는 환성이었다. TV를 중간부터 봐서 혹시나 뒤에 다른 선수가 나오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하다가, 연아는 당연히 쇼트를 1위 했을테니까 마지막 순번이었겠지 뭐 하고 납득했다. 과연 라스트였다. 나도 참.

전광판에 이상한 숫자가 떴다. 190.63. 심판님들 지금 눈이 붙어있는 건가여. 지금 퍼펙 프로그램을 보고 190이 뭔가여? 다른 건 몰라도 이번 건 200점 줬어야 정상이져, 나랑 싸울래여? 하고 순간적으로 스트레스지수가 확 올라가던 찰나에 다른 상위권 선수들 점수를 보니 183, 182, 180 이런 순서였다. 원래 점수가 짠 심판진들이 왔구나 하고 납득하기가 무섭게 연아가 1위에 랭크되었다. 앗싸, 할렐루야. 나는 아까 건네받았지만 프로그램에 집중하느라, 손에 든 채로 먹지는 못하고 있던 겨울 사과를 거칠게 뽀각, 하고 깨물었다. 시원한게 달디 달았다. 꿈이었지만 너무 좋았다. 마오는 3등했다. 꿈대로만 됬으면 좋겠다.




아니 물론 현장에서 직접 보게 되면 더 좋겠구..ㅠ_ㅠ


by 절세마녀 | 2008/12/07 12:46 | 무대뒤편: 야외 공연장 | 트랙백 | 덧글(8)
어제 낮잠이 준 최고의 꿈
무슨 꿈이...




닥터가, [닥터 후]의 그 닥터가 위험에 처해서 구하러 가야했다. 그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 건 이상하게도 나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로즈가 아니었고, 마사도, 도나도 아니어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때, 평범한 아파트인 우리 집에 방문 판애원을 가장한 방해꾼들이 나타났고, 나는 급한 마음에 다용도실 문을 열었다. 다용도실 저 안쪽 문을 열자 10년 넘게 살면서도 있었는지 몰랐던 비밀통로가 나왔다.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길은 자주빛과 보라빛 천개가 잔뜩 달려있고, 바닥에는 칙칙한 페르시안 양탄자가 존재감 없는 여느 카펫들처럼 깔려있는 어두침침한 방이 나왔다. 방 안에는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래형 기계와 계기판이 있었는데 그 방에 위화감 없이 어울렸다.


잠깐 서성거리며 보고 있는데 딸깍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와르르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같은 사람이었고, 동시에 모두 다른 사람이기도 했다. 한 남자의 일생이 한 공간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 남자의 여덟살, 열살, 열두살, 열네살, 열여섯살, 열여덟살, 그리고 스무살의 각기 다른 시점에서 워프한, 다른 나이대의 동일한 남자가 우르르 들어와 시끄럽게 웅성거렸다. 서로를 알아보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음, 좀 어린 나이의 녀석들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내가 그들이 나이만 다를 뿐 완전히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게된 것조차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몇명에게서는 내가 그들을 한눈에 못 알아보는 것을 서운해하는 것이 분위기로 전해져왔다. 어쩌라고, 내 기억에 나는 그들 중 누구 하나도 만난 적이 없었다. 애초에 시공을 초월해서 여러 시점의 '나'가 같은 시간에 모인다는 것이 불가능한거 아닌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한자리에 있었다. 닥터가 뭔가 꼼수를 부려놨다든가 했겠지, 싶었다.


내가 아는 닥터에 대한 모든 걸 말해주었다. 우주 어딘가에서 닥터는 위험에 처해있었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그들이 필요했다. 시공간을 넘어서 타임워프를 해야하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방 안의 기계들은 최첨단이었지만 어딘가 허술하게 고장이 나 내 얼마 안 되는 지식으로로 고쳐야만 했다. 어린 애들은 소파에서 방방 뛰며 놀고, 몇몇은 같이 이야기하고, 또 몇몇은 등 뒤에서 구경하거나, 달라는 도구를 넘겨주거나 하고. 한참 고치다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럼 너넨 거기 가서 같이 돌아다녀?"
"...아니."


하고 열 여섯살이 답했다.


"왜?"
"글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냥 흩어져."


열 여덟살이 그렇게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세팅은 같은 시간, 같은 곳으로 떨어지게 해놨는데?"
"근데 그렇더라고."
"...내가 잘못 고친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스무살이 어깨를 으쓱했다.


"야...그럼 어떡하라고..."


걸어잠근 문 밖에서 방해꾼들이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그런 소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잠깐 손을 놓고 멍하게 있었더니 마음이 급해졌는지 열 여섯살이 얼른 고치라고 닥달을 했다. 그 옆에 서서 "워낙 먼데까지 가야하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웃는 스무 살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도 가야하는 거 아냐?"
"아니, 누나는 안 가."
"왜!!"
"쟤들 막아줘야지. 그리고 그냥, 거기 없었어."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려던 차에 스무살이 한마디 덧붙였다.


"하긴, 어쩌면 흩어지는 게 맞는 거였는지도 몰라."


그는 나를 위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열 여덟살만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그 망할 놈의 기계를 고쳤다. 일생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실패작이라니. 녀석들은 내가 어떻게 고쳐야하는지, 어디를 틀렸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문이 거의 부서져 갈 즈음, 녀석들이 한데 모여 텔레포트 기기 위에 올라섰다. 버튼을 눌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절부절하며 망설이고 있는데, 열여덟 살이 불쑥 말했다.


"그거, 나 주면 안돼?"


그애가 가리킨 건 내 팔목이었다. 만들어서 걸고 다니던 팔찌를 들어보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팔찌를 끌러 녀석의 팔에 걸어주자니 목이 메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지, 누나?"
"그게 아니라, 닥터 옆이 좀 그렇잖아."


답잖게 걱정하는 말을 듣고는 일곱명의 아이들이 웃었다. 그 중 하나, 스무살이 귓속말로 덧붙였다. 괜찮아, 이게 일곱 번째야.


그 애들은 희미하게 웃으며 먼 별들 속으로 사라졌다. 뿔뿔이 흩어진 뒤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 애들이 그 동안 집에 돌아가긴 한건지, 목적지에 한 번이라도 다다랐던 적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스무살, 그 다음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 희소식인지 아닌지도.


어떻게 어떻게 방해꾼들을 피해 달아나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직 세상이 끝나지 않은 걸 보니 그 녀석들은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그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금요일 점심에 학교에 갔다. 인문대 아래쪽 연못이 있는 곳까지 걸어 내려갔다. 햇볕은 적당하고 선선하게 바람도 불었다. 거기서 정말 우연히, 이미 오래 전에 만났으나 그다지 친해지지는 않았고, 거의 늘 존재감이 없었거나 과 모임 같은 곳에 얼굴 비추는 일이 없어, 그래서 애써 기억을 헤짚지 않으면 떠올릴 수 없었던 정도의 과친구를 만났다. 여덟살, 열살, 열두살, 열네살, 열여섯살, 열여덟살, 그리고 스무살의 녀석들보다는 좀더 자랐고 선이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 녀석이었다. 나는 그걸 그제서야 알아차렸고, 녀석이 비로소 나를 아는 척하며 아스라하게 웃었다. "너무 친해지면 안 될 것 같았어. 그, 왜, 시간이라는 게 좀 그렇잖아."


나는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숙이니 소리없이 눈물이 나왔다. 아, 너는 나를 얼마나 오래 알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졌어야만 하는 걸까.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어올린 팔에는
얼마 전에 걸어주었던 그 팔찌가 걸려있었다.













이게 전부 너무 졸려서 잠깐 눈 붙였던 15분 사이에 꾼 꿈이야기.
가히 '올해의 꿈' 중에서도 Best에 들어갈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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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8/07/26 23:44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덧글(16)
요즘 꿈은 대체 왜 이러지

중세 이탈리아였다. 르네상스 시대였을지도 모른다. 이왕 이탈리아면 좀 평온한 시기였으면 좋았을텐데, 하필 또 전쟁 중이었다. 사교계에서의 물밑 작업 뭐 이런 것도 없이 앞뒤 다 잘라먹고 한밤중에 기습이 시작됐다. 지방 영주 간의 싸움이었는지 갑작스러운 습격에 성을 사수해야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영주가 급하게 자신의 친구이자 오른팔처럼 부리던 사람을 불러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 했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상대편 적진, 영주의 곁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이 배신자, 어떻게 나를!! 이라며 영주가 망루 꼭대기에서 주먹을 그러쥐고 탄식했다. 그러고는 의욕을 상실했다는 듯이 주저앉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낙담하고 있는 영주를 끌고 내려와 마차 안에 밀어넣었다. 식솔들은 이미 그 안에 타고 있었다. 식솔이래봤자, 영주의 젊은 아내, 영주의 어린 아들, 그 아들의 놀이 친구, 유모, 영주의 조카 정도였다. 나머지 살아남은 병사들과 기마병 몇을 이끌고 북쪽방향으로 난 지하통로를 빠져나가 도망쳤다. 마차 문짝에 떡하니 문장이 그려져 있길래, 혀를 차면서 손으로 스윽 만지니 지워졌다. 마법같았다.

우거진 숲길과 산길을 넘고 강과 늪지를 건넜다. 모나리자 배경으로 나온 것 같이 아슴푸레한 풍경이었다.
사흘 밤낮을 달려 이만하면 되었겠지 싶은 날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왕이 거하는 궁이 나오니 거기에 반역의 사실을 고하고 보호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우리가 이틀 전에 지나쳐 온 절벽을 보았는데 그 끝에 길다란 외알 망원경을 들고 서서 이쪽을 염탐하는 상대편 영주와 그 곁의 배신자가 있었다. 기묘하게도 눈이 마주쳤다. 직감으로, 녀석들이 우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고서야 이쪽을 보면서 씩 웃을리 없지않은가. 좋게 말하면 자기편한테만 매혹적인 웃음이고(사실 그는 꽤 젊었고 호인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소름끼치는 비웃음이었는데 아무래도 난 적이니까 '아, 재수없다' 정도로 생각했다.


배신과 대패의 충격으로 실의에 빠져 아직도 회복이 되지 않은 영주가 쉬었다 가자고 했다. 미쳤냐고, 방금 쟤들이 우리를 발견했다고, 멈추면 죽는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믿지를 않았다. '병사들도 지친 것 같은데' 라며 핑계를 대길래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버리고 간다'라고 우겨서 밤까지 한나절을 더 달렸다. 가까스로 왕의 직영지에 이르렀다. 진짜 왕이 있는 수도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이지만 설마하니 직영지에서까지 난리칠까 싶어서 공관에 짐을 풀었다. 다들 오래간만에 씻고 쓰러져 잠이 들었다.


자면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연기처럼 흐느적거리는 환영의 군사들이 이 공관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없는지 연기로 그림을 그려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영주(그러니까, 상대편)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몇 년 전에 잃어버린 녀석을 어떻게 찾으라는거야', '옛날에는 이렇게 생겼으니까 지금은 이렇지 않을까' 대강 이런 대화가 오가면서 연기는 아버지와 함께 정원에서 뛰노는 발랄하고 행복한 꼬마에서 제법 자란, 열한살 정도의 남자 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환영의 군사들이 만든 그 영상은 초상화 처럼 얌전히 서 있었는데 나와 마주 보고 있는 방향에 서 있어서 그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눈을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났다. 이쪽 영주 아들의 놀이 친구였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옆 방으로 뛰어가 자고 있는 영주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얘기를 들은 그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한참동안 기억을 헤집다가 마침내 떠올랐다는 듯이 머뭇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친구이자 가신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배신자인 그 녀석과 지방으로 사냥을 간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녀석이 어디선가 주워왔고,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집이 어딘지 기억도 못하는 것 같아 데려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녀석의 배신은 그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전율했다.


또다시 습격이 시작되었다. 한번 잠에 빠진 병사들은 깨어날 줄을 몰랐다. 마신 물에 수면제라도 탄 건가.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영주와 영주의 아들, 그리고 그의 놀이 상대이자 저쪽 영주의 잃어버린 아들로 추정되는 아이뿐이었다. 제기랄,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수는 없어, 라고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공관은 포위되었고 우리에게는 병력이 없었다.


기세좋게 저쪽 영주가 칼을 빼들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따라잡을 수 있었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저쪽이 잃어버렸을 아들 녀석을 인질로 잡았다. "이 녀석을 돌려받고 싶어서인가." 그는 느릿한 비웃음을 입가에 걸치고 짧게 말했다.

"글쎄."
"우린 네 아들을 납치한 적이 없어. 나도 방금 알았어. 모든 건 그 배신자 녀석이 꾸민 일이야. 착각이고 오해라고."
"오해?"

그래, 오해야, 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또 웃었다.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설마 오해가 아니라 이 녀석도 함께 꾸민 계략이었나. 이런 때 그럴 듯한 명분으로 써먹고 상대편을 치졸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왜. 자기 아들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오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지. 어쨌거나 나한테는 유리할 뿐인데." 그는 혼란에 빠진 채로 손을 늦추지 않고 있는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첫번째 이유로는 말이야...


"암살의 위협을 피하려면 차라리 신분을 감추고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위치에, 그러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에 있는게 좋거든. 그런 의미에서 적이라곤 나밖에 없는 정적의 아들 곁은 썩 나쁘지 않더군."


미친 놈,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이지, 거기가 그 녀석 엄마 옆이기도 했거든."
"뭐?"


잠시 상황파악이 안됐는데 뒤에서 '아아, 루크레치아'하는 탄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주였다. 루크레치아는 그 아내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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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과 모략이 횡행하는 이탈리아.
나는 여기서 깼는데
이 뒤는 대체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나는 대체 무슨 포지션이었던겨...)


by 절세마녀 | 2007/06/29 14:44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덧글(10)
꿈 이야기

무려 작년 9월에 꿨던 꿈 이야기 정리

꿈: 바닷소년의 기억




이상한 꿈을 꾸었다.


쇠락한 어촌에 흔하게 전해져오는 전래동화같은 꿈이었다.
나는 아마도 그 어촌의 몇 안되는 아이였던 모양으로, 또래의 동네 아이들과 뜀박질이나 자치기 같이 수수한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을이 크면 먼 바다로 나간 큰 배에 물고기가 하나 가득 실려 돌아오는 것을 기다릴 만도 하건만, 이곳은 너무도 작고 초라해 만선의 꿈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때로 김이나 미역을 한다발 캐 돌아오는 아낙들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아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내 꿈에 등장하는 내가 거의 늘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그리고 그들에게도 '어머니'나 '아버지'는 없었다. 그냥 있을 것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 마을에 문득 생각나기라도 했다는 듯 '그녀'가 나타났다. 푸른 빛이 살짝 도는 백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처럼 녹아들었다. 우리는 그녀를 좋아했다. 아니, 새로운 것에 흥미를 보이며 신기해하면서도 쉽게 다가가지는 못하는 보통의 아이들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맴돌았던 것 같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나 나는 무리 중에서도 그녀와 꽤 가까운 사이-물론 개인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였다. 바위 위에 앉아 석양이 한숨처럼 내려앉는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 옆에, 그녀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거리를 모른 척 하고 앉을 수 있던 것은 나 뿐이었고, 가끔 들을 수 있는 혼잣말에 무심하게 대꾸하는 것도 나 뿐이었으므로.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로 빠지게 되는 상투적인 착각이나 다소의 오만함이라고 해도 좋다. 솔직히 나는 혼자만 알게 된 그녀의 미소-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잘 웃지 않았다-에 조금 우쭐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런 식의 전개도 얼마나 평범하기 그지 없는가-, 배를 묶어두는 부두에서 큰 소리가 났다.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한 소란의 주인공은 이 작은 어촌에서는 몇 번을 다시 살게 되더라도 보기 어려운 바다의 맹주였다. 왠 상어가, 그것도 입을 한껏 벌리면 사람 한 두명은 그대로 삼켜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상어가 뭍까지 다가와 난동을 부렸다. 사람들은 어쩔 도리 없이 조각배들이 더 작은 나무 조각들로 산산조각나는 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역시 너무 놀라 압도적인 분노와 힘 앞에서 멍한 정신-평소처럼 돌을 던지고 어쩌고 할 정신도 없이 말이다- 으로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가 평온한 발걸음으로 다 부서져가는 부두 위를 걸어갔다. 그러더니 날카로운 이를 세우고 맹렬하게 달려더는 상어에게로 손을 뻗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당혹스런 사태를 이해할 수 없어 머뭇거리던 참이었다. 잊혀져가는 바닷가에 집채만한 상어의 등장과 위기의식이라고는 없이 내뻗은 가냘픈 여인의 손-그것도 어촌에는 걸맞지 않는 흰 손-중에 어느 쪽에 더 위화감을 느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정하게, 정말 아무 거리낌없이 이 바다의 불청객을 어루만졌다. 성난 숨소리가 가라앉고, 나무 파편에 상처입고 피 흘리던 이를 감추자 위험천만해 보이던 포식자는 유랑극단의 맹수들처럼 얌전해 보였다. 그리고 상어는 바다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어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시의적절한 해명을 하지 않았기에 그녀 주변에서 떠돌던 호기심 어린 눈초리들은 점점 의혹과 의심에 물들어갔다. 결국 어느날엔가부터는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부외자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이 또한 통상적인 전개다). 그리고 그러한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때로 그녀는 마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고, 그럴 때마다 바다에 면한 바위에 올라앉아 지는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주위를 맴돌던 아이들도 하나 둘 줄어 마침내 나를 제외한 서너 명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어서 간혹 그녀는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묘한 미소를 보내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디선가 모포를 주워와서 몸에 둘둘 감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고, 또 열흘이 스무날이 되고. 이런 식의 일상이 당연해져버려서 나는 그녀가 바다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별 이유도 없이 확신했다. 돌아가다니, 그녀가 바다에서 왔음을 알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는지, 심지어 인간이 맞기는 한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이 또한 나의 근거 없는 감으로 어쩌면 그녀가 바다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또다시, 여느 날들처럼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정오에 그녀가 있을 법한 곳으로 향했을 때,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당황해 그녀를 찾았다. 바다를 향해 달리던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어린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원을 그리는 사이로 어렴풋이 흰 은발을 늘여트린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멈춰 세우고 싶었는데, 이름을 몰라 부를 수가 없었다. 외침은 웅웅거리는 메아리가 되어 바람에 지워졌다.


바다 연안에 거의 다 도착해서야 그녀는 뒤돌아 보았다. 나는 아직 모래사장을 건너기 전, 마을과 바다를 가르는 차도를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다시 망설임 없이 바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안돼, 가지 말아요. 나는 아직 이별을 준비하지 못했고, 늘 전하고 싶었으나 차마 쑥쓰러워 하지 못했던 말도 있다. 그래서 다급하게 보도 블록 아래 차도로 발을 내딛는 순간...


땅이 유사처럼 쑤우욱 꺼졌다.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 뜨니 이미 푸른 빛이 어른어른대는 바다 속. 여전히 저 앞에는 그녀가, 바다 물빛으로 푸르게 물든 그녀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주위에서 깔깔거리며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어느새 지느러미가 예쁜 물고기가 되어 그녀를 뒤따랐다. 물론 나도.


미로같은 해초 사이를 지나 그녀가 다다른 곳은 바위로 둘러싸인 어느 보금자리였다. 그곳에는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걸친 한 남자가 가로 누운 채 병이라도 걸린 듯 간신히 숨을 잇고 있었다. 눈에는 인간 남자처럼 보였음에도 나는 그가 이전에 마을을 어지럽히던 상어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곁에는 정말이지 반질반질 이쁘장하게 윤이 나는 새끼상어가 얌전히 잠든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고기들은 지느러미를 팔랑거리며 그녀 주위에 몰려들었던 그 때처럼 새끼상어를 감싸고 돌았다. 남자는 다소 원망어린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리고 말했다.


왜 이제야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라고 금방이라도 내뱉을 비난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그를 보고 있었으면서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렇듯이 부드럽게 미소지었을 뿐. 언젠가와 똑같이 손을 내밀어 애정어린 손짓으로 쓰다듬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할딱이던 남자는 그것이 무슨 생명줄이기라도 한 것처럼 절박한 몸짓으로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렸다. 아름답고, 신비하고, 또 슬펐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의미에서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든가, 내가 이 바다 밑에서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느냐와 같은 문제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여자와 그 남자(라기보단 역시 상어)가 어떤 관계인지, 또 그 새끼 상어는 무엇인지, 왜 내 친구들이 물고기가 되어 있는지 보다도,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나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처음으로 따뜻하게, 그러나 곧 익숙한 습관처럼 웃어 주던 나날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그녀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어쩔 줄 몰라 일그러진 나의 입 모양을 따라한 것 뿐인지도 모른다.


질투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그녀의 마음을 빼앗고 있는 바다가 부러웠다. 어깨 너머로 힐끗 힐끗 보이는 그 남자도 부러웠다. 비난이었을망정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와 그녀의 대화가 겹쳐지는 경우는 없었으므로. 설령 그가 그녀에게 잊혀졌거나 버림받은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가 아픈 이유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고, 이렇게 되어서야 깨달았지만 나도 그러했다. 저기 누워있는 것이 그 아닌 나라 해도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바다를 사랑했으나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고, 뭍의 바람을 사랑했지만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바다는 더 이상 우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물 속에 뿌리를 둔 맹수와 어촌의 소년은 바다의 가호를 잃어버렸다. 물 속을 떠날 수 없었을 남자는 죽어가고 있었고, 바다는 나를 도저히 차마 삼키지 못해 토해냈다.


파도에 밀려 마을로 돌아왔을 때, 동네를 헤집던 어른들이 달려나와 다그쳤다. 나는 대답했다. 아이들은 바다의 연인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갔노라고. 그리고 거기서 영원토록 행복한 어린아이로 있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다른 세계를 엿보고 돌아온 이들이 대부분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답했다. 몇몇은 울겠지만 곧 체념하고 안도하도록.


나는 돌아옴을 기약하지 않고 마을을 떠났다. 아니, 꿈이 계속해서 이어졌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보통의 이야기 책이 그러한 것처럼. 미련 없이 혹은, 상처받아 외면하듯. 그리고는 마을을 떠나 평범하게 나이를 먹고, 평범한 사람을 만나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삶을 꾸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면 그제서야 첫사랑의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듯 궁색한 핑계를 애써 찾으며 마을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철모르는 어린 아이 시절에 바다를 만나 사랑에 빠졌음에도 삶과 도락에 지쳐 잊어버린 뒤, 자신의 아이가 생겨야 비로소 그들을 위한 휴양지로 다시 바다를 떠올리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에는 그녀도 없을 것이고, 알던 얼굴들도 바뀌었을 것이며 어쩌면 마을조차 사라져 다른 장소가 되었을지도 모르나, 내가 바다였던 그녀를 향해 그 언젠가 그의 목소리를 빌어 무슨 말부터 꺼낼지는 자명하다.

















...그 남자가 상어만 아니었어도 머리 속에 떠오르는 개그이미지를 어떻게 눌러놓고 금방 끝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상어라니...상어라니...제 무의식은 왜 이런거...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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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4/06 00:20 | 서쪽 탑: 상상의 서고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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