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유럽여행
2008/03/25   약간의...야식 테러...? [15]
2007/09/18   [2] 첫번째 탈출 : 바다, 지중해, 그리고 니스 (1) [6]
2007/03/02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2) [17]
2007/02/28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1) [15]
2007/02/03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0) [14]
2007/02/02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9) [14]
2007/01/31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8) [12]
2007/01/29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7) [17]
2007/01/27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6) [9]
2007/01/26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5) [15]
약간의...야식 테러...?

이른 아침에 아는 언니가 이태리에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혹시 이번 기회에 뭔가 필요한게 있다면 구해다 주겠다는 고마운 연락이 왔다.

마녀: 오오, 어디 어디 가는데?
언니: 로마랑 피렌체랑 베니스랑...밀라노는 시간이 없어서 하루 정도?
마녀: 좋겠다. 나도 짐가방에 싸서 어떻게 좀...(굽신)
언니: 아무튼 뭐 필요한거 있으면 말해 봐. 구해다 줄게.
마녀: ......정말?
언니: 그래.
마녀:
나는...






피렌체...






언니: ......
마녀: 로마...
언니: 좀, 내가 들고 올 수 있는 걸로 말해.
마녀: 베니스도 좋아. 주머니에 넣어서 가져와 줘.
언니: 어이, 어이


마녀: 어제 동생이 동유럽 여행 계획을 짜면서 루트를 너무 많이 넣어놨길래
언니: 오호
마녀: 나라면 싸돌아다니느니 피렌체 돌바닥에 눌러붙은 껌딱지라도 될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했어.
언니: ......
마녀: 혹시 너무 싸다고 생각하는 거야?
언니: ...영혼까지 안 팔아도 갈 수 있짆아.
마녀: 응...진심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언니: 아무튼 그래 진짜 필요한 건?
마녀: 물론 있지. 이를테면




피자!!!!!





스파게티!!!!!





플로렌스풍 스테이크와 끼안티!!!!!





칸투치니!!





그리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이스크림;ㅁ;ㅁ;ㅁ;ㅁ;ㅁ;ㅁ;ㅁ;!!!!!!!!













울면 지는 겁니다. 지는거야!! 지는 거라고!!

...라곤 해도 어디 가야하냐고 묻기에 사진 꺼내서 들여다 보다가 아이스크림의 성지, 로마의 간지에 당해버린 전 이미 울고 있지만 ㅠㅠㅠㅜ



죄송. 제가 일부러 이러는게 아니라...
...
...


.....

일부러에요...






by 절세마녀 | 2008/03/25 01:10 | 중앙광장:방랑자의피리소리 | 트랙백 | 덧글(15)
[2] 첫번째 탈출 : 바다, 지중해, 그리고 니스 (1)



2006년 10월의 바다에서




10월 12일-10월 18일 파리
10월 27일-10월 31일 니스->...



눈썰미가 좋으신 분이라면 공지 겸 방명록 글에 꽤 오랫동안 업데이트 되지 않은 채로 덩그러니 뼈대만 남겨두고 있는 여행일정을 보며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쩜 넌 열흘을 못참니. 쫌 붙어있어 봐봐.>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말이기도 한데 맹세코 한국에서는 내가 그렇게 여기저기 종횡무진 싸돌아다니는 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곳에 정 못 붙인다고 해서 그렇게 티내며 탈출을 시도한다든가 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일년에도 여러 번씩 친구들의 거주지가 바뀌는 녹두거리에서 줄기차게 세월아, 네월아 5년동안 한 자취방에서 살았다는 기록적인 역사로 증명할 수도 있다.


하긴 시골에, 깡촌이라도 따뜻하고 조용한 프랑스 남부의 액상프로방스 같은 곳이었다면 또 모른다. 거기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일은, 정말 정말 안타깝게도 그 도시에서 탈출하는 것 뿐이었다. 너무나 볼 게 많아 정신이 없던 파리에서 짐짝을 끌고 4시간 반 걸려 카이저스라우테른 기차역에 내렸을 때, 뭐라 말할 수 없는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흐르며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을 갖고 내게 명령했다. <김기사, 차 돌려. 도로 가자.> 파리와 세상의 끝. 아마 낙폭이 너무 커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지금까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그런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 도시는 이미 존재 자체가 나한테 꽤 당혹스러운 곳이었다.


거기서 봤던 학생 중 하나가 이번 학기에 우리 학교에 와 있길래 사는 거 어떠냐고 물었더니 사람도 많고, 할 것도 많고, 친구들이 연일연야 술 사주고 해서 완전 재밌단다. 음, 그래. 뭐. 그렇겠지. 잘 있다니까 좋긴 한데 좀 착잡한 마음이 되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니네 학교 있을 때 얼마나 지루해서 환장하고 있었는지 이젠 이해가 되지?> 그 애는 그 말을 듣더니,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리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니스에는, 그런 때 갔었다. 한 열흘 정도 기숙사에 짐 풀고, 서류 처리하고, 등록할 거 등록하고, 애들하고 얘기도 좀 하고, 수업도 듣고. 그러다 시내에 나갔는데, 이건 아냐. 나으 유럽은 이래선 안되는 거라. 이쯤되면 도대체 어땠길래, 하고 궁금해할 법도 하지만 나에겐 그곳을 추억할 단 한장의 사진도 없다. 찍은 적도 없고, 찍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설령 찍었다 하더라도 이전 포스팅에 한번 써먹고 곧바로 지웠다. 사진이라는 것이 그 대상에 의식적인 눈길 한번, 생각 한번, 애정 한번을 더 주는 것임을 감안하면 역으로 내가 (그리고 하이디도) 얼마나 그곳에 애정을 가질 수 없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뭐, 여하튼.




니스와 깐느라 하면 나의 지중해 연안 바닷가에 대한 거의 모든 환상이 농축되어 있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탈출에 급급해 아무렇게나 짐 싸들고 나왔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역사적 배경이나 뭘 보아야 한다든가, 그런 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더 추워지기 전에 지중해를 보지 않으면 안돼, 라는 충동이 절반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이미지란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을 이리 저리 끼워맞춘 알량한 퍼즐과 다르지 않아서 뭔가를 떠올리려고 해봐야 노란 페라리 스포츠 카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쪽빛 바다, 출렁이는 금발에 꼭 맞는 황금빛 태양, 피카소, 그리고 이사도라 덩컨이 목에 두르고 다녔을 바람에 휘날리는 스카프(비록 그것 때문에 비명횡사했지만) 그런 것들 뿐이었다.




어렸을 때 바다에 풀어놓으면 죙일 뛰놀다가 버리고 집에 간다해도 몰라라 할 정도였다고 하나, 철들고 발바닥에 모래 묻는 것이 싫어진 뒤로 해수욕에 대한 욕망은 일찌감치 버린지 오래. 물론 '바다'는 여전히 좋아하지만 바닷가에 가면 필연적으로 맡아야하는 후덥지근한 공기와 습기로 눅눅해진 짠내는 좋아하지 않으므로. 가보지 않은 바다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것은 그곳에 대한 정보를 오직 TV와 사진, 인터넷으로 접하기 때문이며, 그 때 전해지는 영상에 짭짤한 바다 내음이나 찐득한 습기는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 지중해와 카리브해, 그리고 남태평양 한 가운데 타히티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바다’에 대한 최후의 희망이자 아직 열지 않은 보물상자와도 같다.



자, 지금 나는 니스에 있다. 도시에 대한 것이라면 만족했다고 말할 수...음...글쎄, 있을지 없을지. 이색적이기는 한데 막 새롭다거나 그렇지는 않고, 굳이 말하자면 '누구나 받아들이다보니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조금은 이상하고 조금은 지저분한 동네'정도에서 시작할까. 기차역부터 해변까지, 걷는 동안 도시 느낌이 참 여러번 변한다. 이를테면,


흡사 뉴델리와도 같은 번잡한 기차역과 상점가,


중세 성채가 남아있는 도심 속의 공중 정원은 그야말로 딴세상이며,


그 아래 구시가지는 유럽 어딘가의 좁고 어둡지만 볼거리가 많은 여느 뒷골목스럽고,


해변에 인접한 카지노와 호화로운 호텔들은 라스베가스를 떠올리게 한다.


어지럽게 정박한 요트 사이로 피어오르는 부의 향기(...)


그런가 하면 이렇게 고요하고 여유로운 오후의 빛에 감싸이는 시간도 있다.



[Marc Chagall, 아가 III ]



그래서...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정신없고 산만한데 어떻게 그림은 나오는 게 꼭 후기 샤갈 그림 같달까. 물론 그는 러시아 출신이고, 여기서 째끔 떨어진 방스(Vence)에서 살았다. 하지만 여기나, 거기나. 어쨌거나 이 동네가 좀 그렇더라고. 서로 다른 것들이 그 어떤 규칙이나 구획과도 관계없이 여과 없이 섞여있는데, 그런데도 다들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신기하기도 하지.


[클릭해보아요]



이 사진만해도 부두 끝 쪽에는 이 동네 사람인 듯한 남자들이 낚시를 하다말고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반대편에는 중국인처럼 보이는 한 무리의 여행객들이 바다를 보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고, 그런 황망한 가운데 샤갈이 그린 그림의 아담과 이브처럼 자갈밭에 누워 지근거리는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 한 장면에 담겨져 있다. 나름 무슨 지구, 무슨 지구 하며 나눠져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그 구획이라는게 좀 모호하다. 길도 적당히 신호 안 보고 건너도 되고. 어느 쪽이 구시가이고, 신시가지인지 걷다보면 어느 새 다른 곳에 와 있고. 기타 등등.



장르로 치자면 들꽃과 잡초와 비싸보이는 나리과 꽃들이 뒤섞여 있는 한 다발의 잡탕꽃다발, 그래서 무대에 올리면 소위 엄격한 장르주의자들에게 말 많이 듣고 손가락질 좀 당했을 것 같은, 그러나 역시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해 눈길을 뗄 수 없는.



하긴 내가 갔을 때는 막 성수기 휴가철이 끝나 미뤄두었던 공사를 한꺼번에 하는지 여기저기 길이 파헤쳐져 있어 더 복잡하고 산만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바다. 바다는 참 맘에 쏙들게 볼만했다. 시끄러운 차도와 도시에 등을 돌리고 바라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감람의 바다 Côte d'Azur. 하늘이 몇 번씩 겹쳐져 빚어진 사파이어가 풍덩하고 뛰어들어 수면 언저리에서 빛과 함께 너울거리다 이윽고 반짝이는 파도로 부서지는 바다.


그래, 이런 바다라면. 밤기차를 타고 세상의 끝에서 빠져나오느라 생긴 10시간 짜리 피로를 가뿐하게 무시한 채 자갈 해변에 앉아, 그래, 이런 바다라면 정복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뭔가를 좋아해도 꼭 그걸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런 류의 리액션을 상당히 풋, 하고 웃어넘기는 쪽이었는데, 음. 고백하자면, 오르세와 마르모땅의 그 많은 모네 그림들 앞에서 넋을 놓고 그 아름다움에 반하면서,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생각이 있었으니 <아, 대체 왜 나는 이걸 집에 가지고 갈 수가 없는 거야, 왜.> 였다. 맨정신으로 다시 생각하면 말도 안되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그렇게까지 '가지고 싶다' 라는 욕망에 불타본 적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하나쯤은 있겠지. 이를테면 위에 정복 운운 한 건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 눈부신 태양 아래 전신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바다를 보며 물결이 자갈밭에 일렁이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아,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이 순간을 손으로 한 줌 쥐어 머리맡에 떠놓고 늘 가까이 하고 싶다> 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 수천가지 스펙트럼으로 빛나는 바다의 깊고 다양한 빛깔 중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파도가 까르륵거리는 둥근 자갈들의 웃음소리를 품은 채 이 열손가락 사이로 하릴 없이 빠져나가게 놓아두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바다에 발을 담그고, 그 바다에 뛰어들고, 그 바다를 끌어안고, 그리고 또 하염없이 바닷가를 거닐며 떠나려는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게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에 갔다가 너무 좋은 나머지 발을 닦으러 간다면서 계속해서 일부러 넘어지던, 아주 먼 옛날의 나처럼. 그러한 생각이 어른의 때가 묻으면서 ‘이 바다를 손안에 넣고 싶다', '가지고 싶다', '정복하고 싶다’ 로 주체할 수 없이 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럴 만도 하지. 이 바다에는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




다시 위로 올라가서, 앞에 걸어둔 동영상, 그 때만해도 동영상 찍는데 익숙하지 않아 품질은 좀 그렇지만 시간이 나면 잠깐 들여다 보시기를. 그러면 시몬, 너에게도 들리겠지. 바람 부는 소리에 섞여 오락가락하는 파도가 꼬맹이 자갈들을 간지럽히며 데리고 노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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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9/18 02:24 | 중앙광장:방랑자의피리소리 | 트랙백 | 핑백(3) | 덧글(6)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2)
세상의 끝에서 돌아온 여독이 안 풀립니다. 졸려요. 졸려요. 이렇게 잤는데도 졸려요. 허리도 아프고 배도 아파요. 우잇씽. 그래도 이어지는 토크토크, 오늘의 주제는 쟁반 노래방.


"오늘은 왜 늦었어요?"
"다 썼는데 화면이 굳어서 싹 날렸어."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2)




"......"
"......"
"징한 놈."
"벨기에 가서 홍합 사온 건 어디의 누군데요?"
"아무리 그래도 길거리에서 파는 깔쪼네까지 싸서 들고 올 줄이야."
"떠날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독일 음식 별로 먹고 싶지 않잖아요?"
"......훌륭해. 잘 사왔어."



"Chianti도 사왔네?"
"전에 같이 여행갔을 때를 떠올리며 한 병 집었어요."
"좋아, 좋아. 훌륭해."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에도 파티해요."
"늘 하고 있는 파티긴 하지만 그러도록 하지."
"그리고 오늘에야말로!!"
"응?"


"'세일러문'을 완성시키는 거에요!!"


"......"
"저번에 돌아올 때 기차 안에서 성공하지 못한 이후로 기차만 타면 머리 속에서 내내 맴돈단 말이에요."
"세상에는 검색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잖니?"
"언니도 아시잖아요. 여유있게 만화주제가를 검색하기엔 학교 회선이 우리를 거부한다는 걸."
"그건 그래."



"그래서, 어디까지 했더라. 멜로디는 너무 선명한데 영 가사가..."
"앞부분부터 막혔어요. 한소절 건너 뛰고, 지금 이순간이 꿈이라면."
"OOO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 걸 고백 할텐데."

"또 한소절 건너 뛰고, 자꾸만 설레이는 내 마음."
"동화속 마법의 세계로 손짓하는 저 달빛."
"아아~,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아아? 다른 단어 아니었어? 일단 체크."
"꿈결 같은 우리의 사랑."
"이 다음도 생각 안나. 뭔가 여러 사람 복작복작한 데에서 당신을 만난건 우연이 아니네 어쩌구 했던 내용 같은데."
"그리고 마지막이 무적의 세일러문."


"무적?"
"보통 이런 만화 주인공들은 적이 얼마나 세든 무적 아니에요?"
"당신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닌데, 그게 무적이야?"
"어떤 의미에서는 충분히 무적이에요."
"미저리도 아니고."
"그럼 뭘까요. 사랑? 정의?"
"아냐, 'O적'이야."
"흠..."
"아, 그럼 그거겠네."
"뭔데요?"
"기적."
"아하, 하나 클리어했다."


"구멍이 하도 많이 뚫려있어서 어디서부터 수습해야할지 감도 안 잡혀."
"앞에서부터 할까요?"
"분위기는 확실하게 떠오르는데 말야. 그 당시 주제가 치고 애들 만화 같지 않은 묘한 구석이 있었지."
"맞아요. 보기드문 단조에 뭔가 밤 이미지가 많아서..."
"뽕짝."
"...에?"
"처음 듣고 '이게 왠 뽕짝?'했었어."
"......"
"뭐, 나한테는."


"아무튼 처음 시작할 때 의미가 약간 그런 거였는데. 뒷부분 가사가 '이게 꿈이라면 고백할텐데'니까 앞은 그거 아닐까?"
"어떤 거요?"
"'내가 원체 춈 소심해서놔서 말이지', 이런 거."
"......"
"비슷할 걸."
"어렴풋이 기억 났어요."
"오오, 뭔데?"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자, 그럼 다음으로..."
"왜 미안해?"
"모르죠, 그런데 입에 붙은 말인걸 보니 이게 맞는거 같아요."
"...왜 미안해? 고백 못했다고 미안할 필요가 어딨어. 속 상하는 건 자긴데."
"따지지 말아요."


"그럼 다음은 OOO 너에게로 다가가, 부분인데."
"뭘까, 조금씩?"
"음...좀 다른 느낌 아니에요?"
"하긴 그래. 지가 무슨 어린왕자 꾀는 여우도 아니고 뭘 조금씩 다가가."
"그전에 여우가 어린 왕자를 꾄 것도 아니고 말이죠."
"입 모양이 좀더 벌어져야 하는데 뭐지."
"혹시 이거 아닐까요? '살며시'"
"오호, 그거 맞는거 같아. 적당히 하고 패스"


"이번엔 한소절 뭉텅 빠졌네요."
"이것도 내용은 기억나."
"어떤 건데요?"
"밤이 깊어서 할 일은 없고, 전화는 하고 싶은데 너무 늦어서 못 하겠고, 그래서 외롭고 쓸쓸하다는 분위기였지."
"......고작 한 소절인데 무슨."
"진짜야. 그래서 애들 같지 않은 내용이다!! 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었어. 연애 아니면 불륜 뿐인 금요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장면이잖아."
"......"
"......"
"아, 전화도 할 수 없는 밤이 오면."
"훌륭해, 훌륭해."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 하나도 안 나오잖아요."
"행간을 읽어. 내가 볼 땐 딱 그 소리구만 뭘."


"음, 뭉텅 잘린 뒷부분은 뭘까."
"언니가 말한 내용 대로 끼워 맞추면 대강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닐까요?"
"글자수가 안 맞아. '이렇게'도 아닌 것 같아."
"그럼 수없이?"
"오호, '수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직도 한 글자 많아."
"'들'을 빼는거 아닐까요?"
"아냐, 저긴 복수형이었어."
"......어떻게 그런 식으로만 기억해요?"
"세상에는 기억해야할 만한 것들이 이거 말고도 많으니까."


"......"
"......"
"혹시 '사람'이 아니었던 건가!!"
"......대단한데. 사람도 아닌 걸 사랑했던 건가, 세일러문."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라요."
"알아. 그러고보면 얘네들 모두 별에서 온 녀석들이었지."
"별 아닐까요?"
"그런가보네.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서."
"기억 나요. 그 다음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건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어."
"기적의 세일러문"
"와와와와와, 만세."



(이후 밤새도록 와인을 퍼마시며 신데렐라, 삼국지, 나디아, 비밀의 화원, 마법소녀 리나, 요술소녀, 캡틴플래닛, 피그마리오, 백설공주, 피구왕 통키 등등의 만화 주제가를 머리를 쥐어짜며 완성시키고 장르를 바꿔서 온갖 가곡(...주로 고등학교 음악책에 등장하는)과 동요(아기염소, 노을, 부채춤 등)와 O sole mio, Caro mio ben, 돌아오라 쏘렌토로까지 찍고 이날의 쟁반 노래방은 막을 내렸습니다.)



"힘들었다. 쟁반 노래방 진짜 아무나 하는게 아니군."
"이거 학교 다닐 땐 시험도 봤던 노래들인데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는 거죠?"
"몰라, 우리 반은 합창대회에서 '유랑의 무리'로 상도 탔었다고. 근데 가사가 하나도 기억 안나."
"독일어 과였으니 독일어로 부르지 않아요? 기억 안 날만도 하죠."
"말도 안돼. 200번은 연습했단 말야."


"근데 우리 참 묘하게 가요는 안 불렀네요?"
"가요에 약해."
"왜요?"
"부모님이 다 클래식 애호파라..."
"그럼 그럴만 하죠 뭐."
"거기다가 어렸을 때 독일 갔을 때가 딱 한국 가요사의 분기점이었어."
"어쨌길래요?"
"나가기 전에는 용필옵화 만세였는데, 돌아오니 서태지가 나왔더군. 그 다음부터는 전혀 따라갈 수 없었지."


"그나저나 우리 밤중에 왜 이러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어요."
"왜 그런데?"
"시험도 보고, 성적 문제도 해결했더니 마음이 이미 이 도시를 뜬 거에요."
"이제 완전히 기차 탄거야?"
"집에 가는 기차 타버린 거에요. 그렇지 않고서야 기차 여행할 때나 하는 이런 짓을 할리 없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내일부터 피렌체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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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3/02 01:54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17)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1)
세상의 끝에서 돌아와도 남은 이야기는 계속 됩니당. 오늘의 주제는 미란다, 이녀석!


"왜 이렇게 늦게 올리는 거에요?"
"...갑자기 인터넷이 너무 잘 되잖아."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1)


“어, 웬일이세요?”
“환경을 바꿔서 식사를 해보고 싶었어. 우리 집 부엌 조금 질리기도 했고...”
심심하다 못해 환경을 바꾸고 싶은 거라면 좀 더 좋은 곳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아요?”
“왜, 미란다 냄비 또 안 치웠어?”
두 개나 올려놓고 방으로 사라졌어요.”
“그냥 닦아서 쓰면 안 돼?”
“그러고 보니 거기에 대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게 있어요.”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
"......"
"그니깐 뭘 올라오세요."
"참혹하구나."
"언니는 인마더러 아침에 우유 컵 안 닦고 나간다고 불평하시지만 그 정도는 애교라고요."
"하긴 그건 내키면 내가 닦아버릴 수도 있지."
"부엌 청소 싹 해놓고 샤워하고 나왔는데 이 기름때 묻은 냄비가 눈에 들어오면..."
"와, 그거 굉장한걸. 이 기름때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머리결을 타고 흘러내리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찝ㅉ......"
"아악. 그렇게 말로 구체화하지 말아요, 좀."



"뭐, 아무튼."
“오오오, 진짜 홍합이네요?”
“그래, 이 맛이야. 가슴 속 깊이 북해의 파도가 물결치는구나.”
“벨기에에서 사온 건 그렇다 치고 이거 북해산이에요?”
“응? 설마 아닐라고.”
“알고보면 '알래스카산 영덕게' 같은 걸지도요.”
“그 정도 디테일은 마음의 눈으로 무마해주겠어.”



"오른쪽은 굴소스 새우볶음이고, 왼쪽은 뭐에요?"
"똑같은 건데, 페코리니 치즈가 들어간 토마토 소스를 넣었어."
"오옷, 여러가지 만들기 귀찮다더니."
"이 정도는 그냥 원소스 멀티유즈지."


"하려던 얘기는 뭐야?"
"그 전에 여기서 말하면 알아들을테니까 호칭을 다른 걸로 바꾸는게 어때요?"
"......"
"......"
"그럼 오란씨?"
"갑자기 왜 그게 나와요?"
"미란다니까."
"그러고보니 한국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연관성이네요, 좋아요."


"글쎄 말이죠. 전 여태껏 혹시 제가 뭐 잘못한게 있는줄 알았어요."
"왜, 오란씨가 뭐라 그래?"
"다른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미란다가 그러는데 혹시 니가 걔 냄비 썼어?'라고 그러는 거에요."
"......"
"......그렇게 냄비를 올려놓는 게 진짜로 절 못 쓰게 하려던 건가 봐요"
"내 식신에 맹세코 지난 넉달 동안 네가 그 집에서 밥 먹은 적은 세번 뿐이야."
"저도 어이가 없어요. 한번은 네가 깜빡하고 물컵이랑 스푼 하나 싱크대에 놓고 잔 적 있거든요."
"근데?"
"다음날 아침에 '좀 씻지?'하고 메모가 붙어있는 거에요."
"......뭣?"
"보는 순간 혈압 올라서 냄비 들고 창밖으로 집어 던질 뻔 했잖아요."


"게다가 더 웃기는 건 그놈의 냄비, 처음엔 저더러 그냥 쓰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사했을 때 말하는 거지?"
"네. 처음에는 사이 좋았어요."
"그랬어? 늘 티껍게 인사하길래 원래 그런 줄 알았어."
"아냐요. 나름 뮌헨에 같이 여행간 적도 있어요."
"오호."
"언니가 오기 전엔 늘 저녁도 같이 먹었다고요."
"......저녁식사를?"
"네."
"......늘 같이?"
"네."


"......"
"......어."
"풉"
"그러고 보면 언니가 온 다음부터 묘하게 툴툴거리기 시작했는데."
"푸하하하하하하하, 미안해 미란씨."
"뭔가 그 다음부터 인사도 티껍게 받기 시작했..."
"고의는 아니었는데, 저녁 식사 말상대를 뺏어가서. 푸하하"
"......"
"외로웠으면 말을 하지. 같이 먹을 수도 있는데. 푸하하하하하하."
"오란씨, 내가 좋았으면 말을 해, 말을."
"소심하고 치사하게 반항의 퍼포먼스를 펼쳐봤자 너무 오래 걸린다고."


"게다가 생각해보니 오란씨가 썸씽이 있던 남자애가 있었어요."
"근데?"
"그때쯤부터 안 오기 시작했어요."
"오오, 뿌리 깊은 이중의 원인 발견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같이 사는 사람한테 이게 뭐에요?"
"같이 사는 사람한테 불만이 생기면 빨리 풀어야하는데 넌 나만큼이나 이 집에 안 붙어있잖아."
"사는데 뭔가 사건이 일어나야 잊어먹기도 하고 그럴텐데 이 동네 지겹도록 시간은 안 가고 말이죠."
"이 지겨운 동네에서 집에만 있으니 성격 버리는거 당연하지."
"거기다 남자 문제 스트레스였다니."
"애도 아니고, 어디서 화풀이야."
"애 맞아요."
"응?"
"나이가 언니보다 한참 어려요."
"......미스테리 풀렸으니 디저트나 먹자."




"......"
"......"
"대체 이유가 뭘까요."
"왜 이태리는 과자조차 맛있는 거지."
"칸투치니도 그렇지만 저번에 사온 무리노 블랑코의 초콜렛 과자."
"그것도 좋고 이거, 버터 함량은 적고 곡류를 잔뜩 넣어서 만든 것 같은 이 쿠키의 건전함. 소금과 버터, 초콜렛을 미친듯이 넣은 독일 과자랑은 차원이 달라."
"......"
"마치 태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통밀과 보리 같은 걸로 만든게 아닐까 싶은데, 느끼하지도 않고 그렇게 달지도 않으면서 달달한 것이 커피랑 먹으니 환상적..."


"...안되겠어요."
"응?"
"이태리 가야겠어요."
"뭐?"
"과자 얼마 안 남았다고요."


"......"
"......"
"잘 다녀와."
"왜 안 말리는 거에요?"
"가는 김에 내 것도 좀 사와."
"......"
"넌 할 수 있어."
"......"
"트롤리 빌려줄게."
"......"
"지금 가면 카니발도 할걸. 가서 보고 와."
"......"
"겨울에 유럽에 있을 수 있다는게 인생에서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거든. 갈 수 있을 때 가."
"와, 이 악당. 유혹하면 갈 것 같아요?"
"카니발 보러 가는 김에 덤으로 과자 좀 사오면 되는 건데 뭘, 안 그래?"
"음, 으음. 하지만 저 어머니 오시면 파리도 가야하는데..."
"파리에는 저 과자 없잖아?"





























<결국 과자사러 이태리까지 밤기차 타고 14시간 넘게 달린 용자,
그대의 이름은 하이디>





유레일 패스가 남았었어요(...)
아참, 왕복으로 기차 타고 갔다 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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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2/28 02:28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15)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0)
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끊길 듯 말듯 이어지는 식사 통신. 오늘의 주제는......만담에 주제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버린 저.


“탈출한다더니 어떻게 된 거에요?”
“......늦잠 잤어. 내일 할 거야.”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10)


“전부터 궁금했는데..."
"응?"

"그걸로 몇 가지나 할 수 있어요?”
공식적인 용도는 감자 껍질을 벗기는 거지.”
“그런 거 말고 언니가 할 수 있는 거요.”
“글쎄, 껍질이 있는 거라면 야자 빼고 뭐든 벗길 수 있어. 당근, 브로콜리, 양파, 오이, 소스용 토마토 기타 등등.”
“그래도 보통 사과를 깎지는 않지 않아요?”
“......”
“......”
“편해.”
“......”
미적 가치보다 식욕이 우선시 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오렌지도 깔 수 있어. 보여줄까?”
“아니, 괜찮아요.”


“당근에 칼집 내 놓고 밀면 채썰기도 할 수 있지.”
“오호.”
“여행 다니다가 여차하면 비닐 포장 뜯을 때도 쓸 수 있고, 그물망도 끊을 수 있어.”
“거의 스위스 칼이네요.”
“그것보다 훨씬 가벼워. 병을 따거나 손톱을 깎을 수는 없지만 내 취향이야.”
그래서 유일하게 집에서 가져온 주방용구가 그거에요? 젓가락도 빼먹고 왔으면서?”
“......버스 안 같이 좁은 공간에서 과일 깎아 먹는 데는 최고라니까.”



“...그냥 인생 전체가 여행이죠?”
“어떻게 알았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수건이 스포츠 타월인거 보고 눈치 챘어요.”
My two favorites. 가볍고 유용하거든.”
“......옷장 안에 겹칠 수 없는 챙 모자 두개랑 치마폭 엄청 넓은 드레스 있는 거 알고 있는데요.”
“그거랑은 다른 문제야. 뭐랄까, 일종의...”
“......”
“디저트라고.”
“메인 디쉬의 위치를 위협하는 디저트요?”
“그래, 그런 거.”


“어쨌든 적어도 그 칼보다는 마음에 들어. ‘doesn't harm, doesn't kill, doesn't wound.’
“그게 무슨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에요?”
“소닉...소닉 감자칼이라고 할까, 그럼?”
“하여간 이 칼은 정말 안 들어요. 양송이밖에 못 자르겠다니까요.”
“먼저 살던 사람들이 쓰다가 버린 걸 그 다음 애들까지 쓰다가 놓고 간 거니까. 칼날 가는데다 아무리 갈아 봐도 회생이 안 되더군.”
“이 집엔 칼날 가는 게 다 있어요?”
“응.”
“과연 축복받은 찬장. 양송이 전용 칼칼날 없는 강판, 아몬드를 부수는 마늘 빻개, 아무도 쓰지 않는 밀가루 밀대와, 들지 않는 칼날 갈개까지.”
“굉장하지 않아?"
"뭐가요?"
"이렇게까지 대충 다 갖춰져 있는데, 이렇게까지 쓸모없기도 쉽지 않지.”
“그러고 보니 새 걸 사기도 미묘하게 있을 건 다 있네요.”



“훗, 우리에겐 칼도 없고.”
냄비도 없고!”
“잘 드는 채칼도 없어요!”
그래, 하지만 그래서 너희가 이 닥터우리를 무서워하잖아.”
“빵틀도 없고, 오븐도 없고.”
“심지어 저울도 없는데 브라우니를 만들었지!”
“못 할 줄 알았지? 다 한다구.”



“봐. 가진 건 접시와 와인뿐이지만 깔보나라 스파게티를 해냈다고.”
“오오, 훌륭해요. 피렌체에서 마셨던 끼안티네요?”
“응,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스파게티에 생모짜렐라를 올려봤어.”
“오, 근데 왜요?”
“뭘 알려고 그래. 그냥 먹지.”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파르마산 치즈가 없었어.”
“알았어요. 안 물어볼게요.”


“미묘하군.”
“뭐가요, 맛있기만 한데.”
“맛있긴 한데 미묘해. 왠지 100%가 아냐.”
“......음?”
“이거 좀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고.”
“올리브 기름에 볶은 양파, 새우, 브로콜리, 뉘른베르크 소세지, 양송이, 치즈...후추까지 뿌렸으니 빠진 거 별로 없는데요, 오늘은?”
“왜지, 왜 100%가 아니지?”
“그냥 드세요. 맛있는데.”


“아.”
“알아냈어요?”
“근데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뭐가 빠졌는데요?”
"......"
"......"
“하몽.”
“......”
“굽지 않았을 때는 얇은 살이 혀에 착 감겨들고, 구우면 베이컨 따위가 따라올 수 없는 깊은 향을 내는 그거.”
“......”
그걸 잘게 잘라서 면이랑 소스에 넣고 냄새가 배도록 볶으면 정말 죽여주는 맛이 나ㅇ...”
“......스페인 가버리겠어요.”
“그, 그럴래?”
“일단 이건 먹고요.”


“지금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
“아까의 조리 과정을 마음의 눈으로 재생해서 하몽을 넣고, 마음의 혀로 맛봐주겠어.”
“......가능한 거에요?”
“눈에는 사실 자동 편집기능이 있어. 관심 없는 대상은 제대로 보지 않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임의 삭제 및 수정이 가능한데 삽입은 안 될까봐? 이른바...”
“......”
‘감각의 재현’을 이용하면 가능해.”
“어디서 들어본 건데.”
“......<유리가면>.”
“아, ‘두 사람의 왕녀’죠? 오리겔드와 알디스가 나오는 거.”
“응.”


“스페인 간다고 하니까 말인데...”
“아직 안 가요.”
“아무튼 뮤지컬 생각을 하면 런던에 한번 쯤 갔다 오고 싶기는 해.”
“가세요, 그럼.”
“근데 가서 밥 먹을 생각을 하면 전혀 가고 싶지 않아져.”
“저도 마찬가지에요.”
“애프터 눈 티세트라든가, 티포트라든가, 얼 그레이에 방금 구운 스콘이라든가, 닥터 DVD라든가 생각하면 가고 싶어.”
“그렇게 탐나는 게 많은데 왜 안 가요?”
“하지만 맛없다고.”
“하긴, 같은 재료로 그렇게까지 맛없게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의외로 중요한가 봐, 음식. 전에는 왜 내가 그렇게까지 마음 속 깊이 영국을 거부하고 있는지 몰랐어.
“언니가 너무 안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에요. 먹지도 못하는 그림만 방에 잔뜩 쌓아두면 뭐해요.”
내 마음의 양식이야.”
“몸의 양식은요?”


“......”
“......”
“그러고 보니 <닥터 후>, 카디프에서 이번 시즌 촬영 중이래.”
“화제를 돌리지 마세요.”
“카디프, 런던에서 버스로 3시간이래.”
"......"
"......"
“......가, 갈까요?”
“가고 싶지?”
“네.”
“나도. 근데 그 얘길 듣고도 마음이 갈등하더라니까. 맛없어, 맛없어, 하지만 눈과 귀가 즐거운데, 그런데 맛없어, 라고.”
“새, 생각해보도록 해요, 우리.”
“그래.”






음...중간에 저건...<닥터 후>2005년 시즌에 그런 대사가 있어요

"하지만 넌 무기도 없고, 전함도 없고, 작전도 없다!"
"그래, 그래서 너희가 이 닥터를 무서워하잖아."


주위에 아무 것도 없는데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사용하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대사랄까, 그런겁니다.

<내일은 진짜 탈출입니다. 즐거운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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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2/03 01:23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14)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9)
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계속되고 있었던 식탁머리 이야기. 오늘의 주제는 음...슬픔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잡동사니로군요.


“그나저나 나 어제 무슨 생각으로 애드립 하겠다고 한 거지.”
“레포트 끝내고 뻗을 줄 몰랐던 거죠.”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9)


“맛있는 거 해주세요!!!”
"......"
"......"
“뭐야, 다짜고짜.오늘은 아직 슬프지 않다고.
"하지만 곧 그럴거에요."


"왜?"
“할 일이 많아요. 빨래하러 세탁실에 가야하고, 가기 전에 50 센트밖에 안 먹는 세탁기를 발로 차지 않도록 동전을 바꿔야 해요.”
“그리고?”
하루에 3시간 밖에 안 여는 하우스 마이스터의 사무실에 가서 3월에 이 집을 나가버리겠다는 이야기도 해야 하고요.”
“앉아서 얘기해. 서류는?”
“프린트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아써한테 가서 우리 학점 트랜스퍼도 신청해야하고, 하는 김에 아써한테 프린트랑 메일도 좀 부탁하고, 그러고 보니 아써한테 레포트도 내야 해요.”
“......"
“아, 아써. 지갑 잃어버리면서 없어진 반카드(철도회원카드) 때문에 DB(철도회사)에 전화해야하는데 부탁하면 해주겠죠?”
“해주기야 하겠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아써...”
“......”
“......교수님인데.”


“할 게 이렇게 많은데, 어제 밤에 뭐 했는지 아세요?”
“......뭘?”
지뢰 찾기요. 메모장에 편지 쓰다가.”
“게임 안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게 누구더라.”
“같은 시간에 언니가 프리셀 했다는 거 다 알아요.”
“아냐, 나, 난...”
“......”
“......핀볼했어.”
“그게 그거죠.”
“달라, 좀 더 손가락과 눈의 신체 협응력을 이용해야 한다구.”


“그러니까 맛있는 거 해 주세요.”
“방금 말한 거 다 하면.”
“그럼 이따 저녁 때 먹어요.”
그거 다 하고 집에 들어올 수 있으면 샴페인도 따주지.”
“와!”
“하지만 못할걸?”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돌아왔군. 어떻게 됐어?”
“아써가 위기감에 휩싸인 듯 ‘근데 너 레포트 마감 내일까지인 거 아니?’ 랬어요.”
“그럴만하지. 간만에 나타나서 전혀 관계없는 일거리만 잔뜩 들고 갔으니.”
“알아요. 알지만. 레포트 문제로 가서 상담하고 싶지만 이게 더 급했다고요.”
“괜찮아. 어제 나도 그랬으니까.”
“메일 하나 보내겠다고 해놓고 4개나 보내서 조금 미안하긴 했어요.”
“......”
“두 개 확인할 때까지는 그냥 있더니, 다음 걸 클릭하니까 10분 있다 오겠다고 하고 나가버렸어요.”
“......”
“그리고 부엌에 갔더니 미란다가 못 보던 냄비를 꺼내놨어요.”
“산 거야?”
“아뇨. 집에서 부쳐줘요.”
“......독일 냄비 좋은데, 왜?”
“몰라요. 이제 한 번에 3개씩 꺼내놓는 거 아닐까 살짝 두려워졌어요.”


“......”
“왜 그러세요?”
“음, 남들이 우리 만담을 볼 때 이런 기분인걸까.”
“어떻길래요?”
“웃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웃겨.”


“아무튼 난 그동안 슬픈 소식을 만들어 왔지.”
“만들지 말아요. 뭔데요?”
“이유는 전혀 모르겠는데 학교 무선 랜, 어제 우리만 접속 안 된 거 같아.”
“......”
“......정말.”
“어, 어, 어째서 그런!!”
“옆에 크리스티나가 앉았는데 쌩쌩하니 잘 돌아가더라고.”
“제 것만 안 돌아가는 거면 이해하겠는데 언니 것도 안 되잖아요.”
“애지중지하다 버리려고 들고 나온 랩탑도 아니고. 작년 8월 생산품인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새우가 잔뜩 들어간 스파게티다.”
“오오.”
“뭐, 냉동이지만.”
“샴페인하고도 잘 어울리는데요? 뭘 넣은 거에요?”
“글쎄, 오레가노하고 나폴리 소스였나. 오늘은 볼로네제 말고 다른 걸 시도해 봤어.”
“아, 오늘 스파게티도 훌륭해요. 이 브로콜리 딱 맞게 익은 거 하며, 면은 또 왜 이렇게 완벽하죠.”
"......먼 옛날, 레토르트 정복 사업을 훌륭하게 클리어한 결과랄까."


“설거지 다했는데......찬장 앞에서 뭐해요?”
“누가 100% 초콜렛도 나름 맛있다고 하길래 고민하고 있어.”
“오, 그래요? 어떻게요?”
“핫초코에 타 먹어보라는 게 생각이 나서 만들어 볼까 했는데.”
“......그런데요?”
“왜 그래야 하지? 핫초코 맛있는데.”
“......다른 방법 없어요?”
“그래서 브라우니를 만들 때 넣어볼까 했지.”
“만들까요?”
“왜 그래야 하지? 브라우니 맛있는데.”
“전에 카레에 넣어서 먹었다는 글 읽어본 적 있어요.”
“그러니까 왜 그래야 해? 카레, 잘 하면 맛있다고.”


“전 사실 그거 쓴 맛 때문이라기보다 좀 느끼해서...”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생으로 도전해 보겠어.”
“오오. 훌륭해요.”
“......”
“......도전한다면서 2g 짜리를 얼마나 더 나눌 생각이에요?”
“같이 하지 않을래?”
“아, 아뇨. 됐어요.”


"......"

"......"
“......”
“푸하하하하하하하”
“......왜...”
난 봤어. 언니 표정 완전 무슨...으하하하하하”
“내가 뭘. 그냥 먹었는데.”
“본인은 모르겠죠. 표정이 완전 100% 초콜렛이었어!!”
“쳇, 들켰나.”
“게다가 맛을 안 보고 넘기려고 꿀꺽하는 걸 나는 봤지.”
“......알았어. 제대로 씹어 먹으면 되잖아.”


“오, 어때요?”
“긴장을 하고 먹어서 그런지 그냥 그런대로 괜찮은데.”
“하긴 저번엔 이게 정말 ‘초콜렛’이라고 생각하고 먹어서 충격이 더 컸겠죠.”
“하지만 역시......"
"......"
"이대로 1시간 지나도 입 안에 남아있을 것 같은 쓴 맛이야.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아무리 지우려고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오점’ 같아.”
“와, 그거 너무하다.”
“어째서야. 초콜렛의 탈을 쓰고 이렇게까지 초콜렛이 아니라니. 마치 이 ㄷ..”
“안 돼. 제발 스톱. 거기까지!!”
“왜? 내가 무슨 소릴 했다고.”
“마치 유럽인데 유럽 같지 않은 이 도시 같다고 할 거잖아요.”
“응, 맞는데.”
“남의 입으로 구체화시켜서 듣고 싶지 않았어요. 제발.”
"...괜찮아. 아직 디저트가 남아있으니까."



"......"
"......"
"이거 수상한데."
"음, 미심쩍어요."
"이유가 뭐야. 왜 오늘은 더 맛있는 거야."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왜 이렇게나 더 달콤한거야!!"
"아아, 이거 한번 더 만들 수 없을까요, 어떻게?"


"음, 노력해보도록 하지."
"좋은데, 어떻게요?"
"...또 손으로 재면 되지 않을까?"
"식신을 잘 달래두세요."

"한국 가서 한 번 만들어 보겠어. 그리고 만든 다음에 파티라도 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는거지."
"오, 뭐라고요?
"이 브라우니는 내 살이요, 상그리아는 내 피라..."
"......킥."



"역시 이 밀크티, 남은 기간 동안 수련할래요."
"좋을대로. 마시고 싶은 양보다 우유를 조금 더 적게 끓이다가 설탕을 녹이는 동안 옆에 커피포트로 물을 쪼금만 끓여서 차를 우려내다가..."
"내다가?"
"'에잇, 알량하게 한 두잔 마시는데 찻물 우리기 귀찮아!' 라면서 찻잎을 우유에 던져넣는거야."
"......"
"그리고 계피는 대충."
"......그게 다에요?"
"응, 다야."





<내일 이 시간에 계속...
...이라고 말하기엔 저 이 도시 탈출할래요. 브뤼셀 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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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2/02 03:40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14)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8)
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일어나는 99% 실화 식탁 토크(앗, 발음이 어렵다). 주제는 ‘어느 천재와 범재의 이야기’. 오늘은 미란다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근데 이거 이야기하겠다고 한지 꽤 되지 않았어요? 순서 바꿔도 괜찮은 거에요?”
“어디서부터 봐도 상관없다는 게 일일 드라마의 장점이잖아.”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8)



“하루가 지나니 더 맛있어요. 왜지?”
“......”
“뭐해요? 조회 시간도 아닌데 가슴에 손까지 올리고.”
“아, Deep하다. 정말 Deep하다.”
“......”
“내가 하고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정말 Deep하다.”
“그거 정말 이상한 거 알아요?”
“내가 뭘?”
“같은 걸 먹고 있는데 괜히 또 먹어보고 싶어지게 만들고 있잖아요.”
“하지만 맛있는걸.”
“그거야 그렇지만요.”




“옛날 옛적에 말이지, 한 소년이 살았어.”
“평범한 시작이네요. 뭐 하는 앤데요?”
“그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등장부터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지. 배가 고팠거든.”


그는 부모, 형제 없이 세상에 그 혼자만이 내던져진 채로, 자신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세계에는 오직 '자신'과 살아있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허기'만이 존재했다. 나와 남을 구분해주는 이름이나 색채란 주린 배 앞에서 단지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는 현기증에 불과했다. 그의 코는 눈앞에 놓여있는 대상이 먹을 만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으며, 그의 혀는 그것을 오래도록 맛보고 배고프지 않은 내일을 꿈꾸게 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었다.


위장이 스스로의 입술을 씹어 먹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허기가 그를 괴롭혔다. 동시에 그 허기가 그에게 운명적인 배필을 마련해 주었으니, 이름 하여 '요리'였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거리를 전전하던 소년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가장 향기로운 레스토랑에 들어가 '무급에 숙식제공'이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애원했다. 처음에는 청소를, 얼마 안 있어 팔에 살이 좀 오르자 설거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예민한 후각과 품평은 서빙 도중에 음식의 상태를 주방에 알리는데 퍽 도움이 되었으며, 그것을 눈여겨보았던 주방장에 의해 그는 단순 종업원에서 주방보조로, 보조 요리사로, 어느 새 주방장의 솜씨를 흉내 낼 뿐 아니라 자기 스타일의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진짜 요리사가 되어있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요리한다' 라는, 실로 절박한 존재의 이유로 인해 요리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정말로 요리를 사랑했다.


그것은 단지 그가 굶주려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요리를 경외했다.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땅에서 태어났음에도, 같은 물에 씻기고 다듬어져 한 보울 안에서 드레싱이라는 달콤새콤한 옷을 입고 저녁만찬이라는 파티장에 나가는 샐러드를 사랑했다. 활활 지펴 오르는 불이 애정 어린 손길로 리드하면, 구수한 버터와 양파 즙을 맞춘 듯 몸에 감고 무대 위에서 발그레 달아오르는 스테이크에 그는 애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레시피라도 요리사의 미각과 후각에 의해 수많은 바리에이션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 깨달았을 때, 그는 신이 자신에게 드디어 허기에서 벗어나는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환호했다. 만들고, 먹고, 살아 움직인다. 이 얼마나 자비로운 창조의 법칙이란 말인가. 온갖 무관계한 재료들을 알맞은 양에 달아, 꼭 맞는 양념으로 버무려 전과는 완벽하게 다른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요리는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신비로운 창조 능력 중 하나였다. 게다가 그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세 번씩, 죽을 때까지 끝없이 허기지는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유익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허기를 발판으로, 그것을 만족시킬 요리에 대한 열망과 생존의 위협에 따른 성실함마저 갖추었으니 비슷한 또래에 그를 뛰어넘을 만한 요리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상 그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발 빠른 미식가들은 그를 최고의 요리사로 격찬하면서 자신들도 최고의 미식가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의 음식을 감상해 본 사람들은 재료들의 정교하고도 완벽한 조합과 세심한 세팅, 퇴보를 용납지 않는 노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식도락가라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날이 갈수록 유명해졌다. 그리하여 매년 열리는 그의 새로운 요리 시연회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그저 그가 어떻게 요리하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참가를 신청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 날도 수많은 다른 날들처럼 새로운 음식 품평을 하기 위해 그의 추종자가 한데 모여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너무 너무 ‘요리’를 사랑해서 요리사가 된 당대 최고의 요리사와 신문 기자가 나와.”
“천재 요리사라면 만화 많잖아요.”
“아니, 요리사가 노력형 범재고, 신문기자 쪽이 요리를 비웃는 천재야.”
“에, 어떻게요?”
“기자에게 식신이 붙어있었거든.”
“......”
“마치 나와 내 친구를 보는 것 같지?”
“‘마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잖아요. 게다가 그거 어디서 많이 보던 구도인데?”
“당연하지. 아마데우스와 살리에리의 패러디니까.”
“......”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천재와 범재의 이야기라니까?”


“아, 아무튼 그래서요?”
“오늘 같이 추운 날씨에 열린 시연회에 처음으로 취재 하러 온 젊은 기자가 일을 낸 거지. 지각해서 허둥대며 들어온 주제에, 처음으로 개발해서 디저트와 같이 내 놓은 핫초코를 한 입 마셔보고는 무례하게도 레시피에 중대한 수정을 가했거든.”
“어떻게요?”
“옆에 놓여있던 민트 초콜렛을 한 조각 넣어 휘휘 젓고는 무심코 ‘음, 맛있네.’라고 해버린 거야.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추종자들은 당황했지. 따라 해봤더니 맛있지 뭐야.”


“잠깐, 그런 중대한 사건에 왜 민트 초콜렛이 들어간 핫초코인 거에요?”
“내가 그 때 그걸 그렇게 마시고 있었거든.”
“......”
“인스턴트 핫초코에 질려서 그만.”
“......뭐,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틀린 예도 아니네요.”
“심각한 걸 기대하지 마. 이거 어디까지나 개그니까. 그리고 어떤 중대한 사건이라도 충분히 사소한데서 시작할 수 있어.”


“그, 살리에리는 어떻게 반응했는데요?”
“관록이 있으니 처음에는 여유 있게 대처했지 뭐. 어디서 뭐 하는 녀석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몇 마디 이야기 하면서 관찰하다 보니 시원시원한 구석이 있어서 친구 비슷한 게 됐어. 하지만 역시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살리에리 자신에게 있어서는 악당 같은 놈이었던 거야.”
“왜요?”
“그의 전부였던 ‘요리’에 경외감이라곤 없었거든. 요리를 할 때 레시피대로 한다든가, 아니면 나중에 그대로 재현할 수 있도록 기억을 한다든가 하는 일이 별로 없어서 친구가 된 살리에리를 가끔 저녁 식사에 초대해서는 그를 정신적으로 고문했어. 그게 또 자기 딴에는 대접을 한 거라 뭐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게 이중으로 악당스러운 부분이지.”


“나는 정말이지 자네를 이해할 수가 없네. 좋아하지도 않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아, 그거 맛있었어요? 영광이네요, 하고 그가 설거지를 하다말고 이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사주를 보셨는데 식신이 붙어있더래요. 미신이 다 그렇듯이 믿을 건 못되지만요, 그가 덧붙였다.


“나쁘다. 심지어 믿지도 않네요?”
“응.”


분했다. 억울했다.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다면 어린 시절의 고통은 대체 무엇을 예비하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청년은 요리를 잘 했으나, 즐겨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딱히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거대한 위장이 되어 세상과 함께 자기 자신까지 소화시켜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운 허기를 그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일에 바쁜 그에게 있어 요리는 최소한의 사치이자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보고 무엇을 고를까 생각하는 정도의 가벼운 유희였다. 심지어 녀석은 먹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다. 정도를 벗어나는 식탐에는 약간의 죄의식마저 가지고 있어, 음식 맛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친구들에게 조소를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청년의 감각은 가히 천부적이었다.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인류가 기아와 포식의 연속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자명하다지만-멀리서 그가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서있었다.

“역시 그거,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바보 같아요, 하하하하하”

턱시도를 입은 남자들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청년이 이곳에 살아 숨 쉰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같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색해진 공기를 무시하고, 그 길로 돌아와 골방에 틀어박혔다. 청년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며 인생 전체를 비웃었다.



오오,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는 음식에 대한 열망과 걸신만을 주시고,
식신은 내려주시지 아니하였나이까.





“......”
“......”
“음식에 대한 열망과...”
“......”
“......걸신.”
“응, 걸신.”
“......걸신 OTL.”
“내 보잘 것 없는 명예를 걸고 말하자면, 저 대사만큼은 내가 쓴 게 아니야. 개인적으로는 제일 좋아하지만.”
“누가 쓴 거에요?”
“가난한 디아길레프의 절규를 그대로 옮겼어.”
“디아길레프...”
“예술을 사랑했지만 뭘 해도 재능은 없었고, 대신 돈이 많아서 지원 사업을 주로 했던 사람. 하지만 내 친구에게는 돈 대신 식탐과 허기가 있지.”
“문어라는 친구분요?”
“지금쯤이면 캐나다에서 냉동문어가 되어있을 그 친구. 내 식신 이야기를 듣자마자 진짜 저렇게 말했다니까.”



“그러다 죽겠어요. 좀 쉬엄쉬엄 해요.”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손을 멈추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자네는 아나?”

글쎄요, 하고 청년이 대답했다. 그런 걸 제가 알 리가 있나요. 저는 요리사가 아니라 신문 기자라 요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요.

자신이 가진 재능의 위대함을 모르는 천재의 무심한 말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오직 젊은이들만이 자신의 젊음을 비난하고, 재능이 넘치는 자만이 그것의 무의미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나는 지금 최후의 만찬에 비견될 만한 '최후의 레시피'를 연구하고 있다네."
"과식해서 산책하러 나가는 사람이라도 혹하게 만들 법한 이름이군요. 그런데 최후라니 무엇의 최후를 위한 건가요?"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네, 하고 그가 웃었다. 누구의 최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 자네의 최후가 될지, 혹은 나의 최후가 될지 모르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자네가 한 번 이 뒷부분을 완성시켜보지 않겠나."

그가 건넨 레시피를 본 청년의 눈에 흥미와 호기심이 파문처럼 번져갔다. 그와 비례해 남자의 마음속에는 질투와 죄책감이 뒤범벅되어 엉클어진 웃음이 비릿하게 피어올랐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것은 내가 아니라 신이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 스스로의 재능을 몰라보고 그것을 깎아 내린 너의 죄. 감히 노력하는 자와 노력하는 자의 시간과 그 사람의 세계를 능멸한 너.



“그 뒤는 영화랑 똑같아. 청년은 죽고 살리에리는 살지.”
“......어떻게요?”
“뭐, 어떻게든. 천재의 광기보다 범재의 집념이 더 무서울 때가 간혹 있으니까.”
“레시피는요?”
“살리에리가 평생 들고 있다가 발표 안 하고 죽어. 아, 마지막 문장이 이거야. ‘그의 희망대로 ’최후의 레시피‘는 그의 사후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
“요리를 사랑했으나 신에게까지 사랑받지는 못한 남자의 세계에 대한 소심한 저항이지. 자기만이 알아봤던 천재성에 대한 사소한 경의의 표현이기도 하고. 최소한 자기 이름으로 발표는 안 했다고.”
“......그럼 결국 그 최후의 레시피는 뭐였던 거에요?”
“공개되지 않았다잖아.”
“궁금하잖아요.”
“그게 포인트지. 하여간 <아마데우스>, 멋진 영화야.”


“이거 원본은 어딨어요?”
“처음에는 신나게 쓰기 시작해서 도입부, 중간, 끝부분을 썼는데...”
“어, 그럼 다 쓴 거 아니에요?”
“말 그대로 앞부분 4문단, 중간 2문단, 그리고 마지막 한 줄 밖에 안 썼어.”
“설마 지금 보여 준 게 다라는...”
“응.”
“......”
“......진짜야.”


“왜 다 안 썼어요?”
“글쎄, 쓰다 보니 내가 너무 나쁜 놈 같아서였나?”
“......”
“아니, 생각해 봐. 아무리 경박해 보였어도 모차르트는 음악가에 진짜 천재였지만 이 신문기자는 견습요리사조차 아니었단 말이지.”
“......”
“살리에리, 이해한다고. 인간이면 보통 다 이해할 수 있어.”
“......”
“날 믿어. 인생의 다른 부분에선 나도 살리에리니까. 사실, 주로 살리에리야.”
“하긴.”
“아무튼 그래서 계속 썼다간 살리에리가 꿈속에 나타날 거 같더라. 그래서 더 이상 쓸 수 없었지.”


“......”
“......진짜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귀찮았던 거 다 알아요.”
“쳇, 눈치 채긴.”





<내일 이 시간에도 올 수 있으면 애드립으로 옵니다.>


한 시간쯤 삽질하다가 스페인 친구 컴퓨터로 접속했습니다. 왜, 왜지. 도대체 왜 저와 하이디 컴퓨터로만 접속이 안 되는 걸까요.


이 회선 자식!!! 날 거부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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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1/31 01:23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1) | 덧글(12)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7)
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계속되는 99% 실화(진짜) 키친 토크. 오늘의 주제는 '밀크티와 브라우니'. 한 번 미뤄진 이야기는 습관처럼 계속 쭈욱 밀리고 있습니다.



“누가 이거 진짜 실화냐는데?”
“아니면 대체 이런 영양가 없는 음식만 잔뜩 나오는 이야기를 왜 쓰겠어요.”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내 이름이 하이디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라.”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7)



"......"
"왜, 맛없어?"
"내일부터 매일 아침 수련하러 오겠습니다."
"이, 이런 거 수련하지 마. 엉터리라고. 짜이를 마시고 싶었는데 생강가루가 없어서 귀찮은 나머지 우유와 설탕, 찻잎, 계피가루를 한꺼번에 넣고 끓인 거란 말이야."
"맛있어요. 특히 이 한번 끓어올랐다가 꺼지면서 생긴 우유 거품이 사르르..."
"얼그레이가 좀 맛있긴 하지."
"한국에 돌아가도 끓여버리겠어요. 찻 잎 비싸겠지만 끓여버리겠어. 울면서 끓여버리겠다고요."
"끓여, 안 말려."
"근데 왜 갑자기 밀크티에요?"
"추우니까 생각이 나더라고. 따끈해진 머그 잔을 양손에 든 채 창밖을 바라보며 이 달콤하고도 이국적인 계피 향기를 맡으면서..."
"오오."
"밖에서 1cm도 안 쌓인 눈에 마냥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있는 녀석들을 발견하고는 훗, 하고 웃어주는 거지."
"......"



“재료는 다 사 놨고...레시피 가져왔어?”
“여기요. 초콜렛 200g, 밀가루 75g, 계란 2개, 우유 80ml, 설탕 90g, 버터 100g, 베이킹 파우더 조금.”
“음, 2배수로 만들 건데 집에 저울 있지?”
“당연히 없죠.”
“그럼 일자는 뭘로 파이 만든 건데?”
“몰라요. 파이 믹스 사다가 하지 않았을까요?”
“그랬던 거야? 그럼 이거 어떻게 만들자고?”
“......”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야.”


“언니의 감을 믿겠어요.”
“어이.”
“식신의 기분이 최고조인 이 때.”
“......지금 날더러 손으로 밀가루와 버터, 설탕의 양을 재라는 거지?”
“네.”
"진심이냐. 너의 냉철한 이성은 어디로 간 거야."
"이해해 주세요. 미란다의 냄비가 아침에 부활했어요."
“......알았어. 대충 만들어도 되는 브라우니라서 다행이군. 순서는?”
“귀찮아서 안 적어왔는데요.”
“......”
“많이 해봤대매요.”
“마음의 안정을 위해 참고용으로 적어오지 않을까하고 기대했었지.”


"......"
"......"
"......"
"......어때요. 밀가루 한 숟갈 더 올릴까요?"
"아냐. 두 스푼이 좋겠어."
"솔직히 말해봐요. 한 스푼 차이가 느껴져요?"
"쉿, 정신 집중 중이야."
"우유가 160ml인건 계량컵이니까 확실한데 말이죠, 그거 그릇 무게도 감안 하셔야 할걸요."
"그 정도는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어."


“순서는 뭐, 비슷한 거끼리 섞으면 되는 걸 테니까 일단 초콜렛을 녹이고.”
“거기에 실온에서 빈둥거린 버터랑 설탕을 넣자. 어, 바닐라향이 있다.”
과연 4차원의 찬장. 전에 살던 사람들은 여기 얼마나 있었던 거에요?”
“몰라, 한 1년 정도?”
“그 정도 살면서 빵 한번 안 굽기에는 심심하기도 했겠네요. 베이킹파우더랑 밀가루, 체에 쳐 둘게요. 우유도 끓이고...”
“그걸 초콜렛 믹스랑 섞은 다음에 조금 식혔다가 달걀 섞고, 밀가루 넣으면 대충 될 거야.”
“왜 식혀요?”
“익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달걀들이 좀 예민한 구석이 있지.”
“......”
“그 왜, 험프티 덤프티처럼.”



“찬바람이~따스하게~두뺨을~스치면~, 훗훗훗”
“싸늘하던~야채호빵~몹시도~그리웁구나~, 후후후후후”
“이 냄새 봐. 눈만 감고 있으면 지상 낙원이 따로 없어.”
“그거 알아요? 방금 나갔다 왔는데 온 빌딩에 초콜렛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어요.”
“저런, 시험 때문에 발이 묶인 가련한 영혼들이여.”
“오오, 웬일로 동정표를?”
“자, 어서 먹고 싶어 해 봐. 벽을 긁어 보라고. 지금이라면 발을 굴러도 용서해 주겠어.”
“......전엔 저한테 같은 방 쓰는 애들 고문한다더니.”
“자정의 초콜렛 냄새는 고문이지. 아침엔 그냥 애교잖아.”



“아, 멋진 반죽이다.”
“그러게요.”
“빵틀.”
“어, 없는데. 있는 거 아니었어요?”
“뭐라고? 일자의 빵틀이 있을 거 아냐.”
“부엌에 안 보이는 걸 보면 방 안에 넣어놨거나 남자 친구 집에서 가져 온 걸지도 몰라요.”
“그럼 지금 이거 어떻게 굽자고.”
“......”
“......”
“이, 일자의 그라탕 그릇이라도......”
“고마워, 일자. 오븐 빌려줬으니 더 이상 불평 안 할게.”


“급조한 빵틀인데 어떻게 이렇게 완벽할 수 있는 거지.”
“뭐가요?”
“반죽이 딱 반으로 나눠져. 환상적이야.”
“오호, 반은 언니 좋아하는 클래식으로 하면 되겠네요.”
“나머지 반은 네가 넣고 싶은 걸 다 넣어. 바나나랑...아몬드가 있군. 아몬드 볶아줄게.”
“고마워요.”
“근데 이거 너무 크지 않아? 작은 게 낫지 않나?”
“그게 좋겠죠. 그럼 칼이 어디...그 나무 방망이는 뭐에요?”
형상을 보아하니 마늘 빻을 때 쓰는 원시적인 도구 같아.”
“......”
“서랍 안에 있었어. 여기가 워낙 4차원이잖아.”
“......내 아몬드를...내 크고 아름다운 아몬드를...방망이로...”
“세상의 모든 물건이 1차적인 용도만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냐. 필요는 꼼수의 어머니지. 네스까페 무스 통처럼.”




“......”
“......”
“슈, 슈가파우더를 뿌려주겠어.”
“저, 저는 코코아 가루요.”

오, 오래간만에 눈 덮인 창밖을 내다보며 먹어 줄까?”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
“......”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후”
“히히히히히...흐흐히히히히히히히”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요?”
“기념 연설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맛인데...”
“뭐라고요?”
“......아아아, 제군들.”
“저 혼자긴 하지만 일단, 네.”
그대들은 이 아침의 영광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오늘은 위대한, 위대한 승리의 날이다.”
“오오, 과연 테이스트 오브 빅토리.”
“매서운 겨울과 한결같은 추위도 우리를 정복하지 못했다. 달렉들처럼 세상의 끝으로 떨어졌지만 우린 살아남았어.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뭣하지만?”
“이렇게 대충 대충 만들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브라우니 처음 먹어 봐. 대체 왜 난 이걸 손으로 잰 거야. 다신 못 만들 거 아냐.”


“하지만 진짜 승리는 뭔 줄 알아요, 언니?”
“뭔데?”
“아직 뒤에 저만큼이나 남아있다는 거죠.”
"응, 그래. 네가 맞아."







갑자기 네이버가 안 열리고, 다움이 안 열리고, 핫 메일이 안 열리고, 프리챌이 안 열려도, 그래서 메일을 제목까지만 보고 튕겨도 어제의 승리는 기억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이시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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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1/29 23:52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17)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6)
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발신 중인 99% 실화 요리 토크. 오늘의 주제는 ‘슈퍼마켓 장보기’. 어제 하려던 이야기는 정리를 위해 잠시 기억의 미궁 속으로.


“그냥 하는 소리겠지만 어떤 사람이 이거 계속 하래.”
“......”
“...영원히.”
“곤란해요. 언니는 그렇다 치고 전 여기 계속 안 있을 건데요.”
“저 엄청난 저주에서 나만 두고 빠져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6)


“안 되겠어.”
“뭐가요?”
“오늘도 슈퍼마켓을 안 가고 버티려고 했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지금 있는 재료로는 만들 수 있는 게 없어.”
“어, 그래도 뭔가 꽤 있는 거 아니었어요?”
“있긴 해. 소고기 없는 감자 미역국, 치즈가 빠진 감자 피자, 감자 콩 스프, 감자튀김, 감자전, 감자 오븐 구이, 삶은 감자 같은 거.”
“결국 감자밖에 없다는 소리잖아요.”
“귀찮아. 왜 한 시간에 두 대 오는 버스를 기다려서 고작 슈퍼마켓에 가야하는 거야?”
“그냥 가요. 어차피 오늘 안 가면 주말에 마켓 열지도 않는데.”


“음, 그럼 피클부터..”
“아, 초코 무스다, 무스 사자.”
“그렇게 서슴없이 목록에 없는 물건부터 집지 좀 말아요.”
“안 먹을 거야?”
“먹을 거지만.”
“자, 그리고 커버춰 초콜렛.”
“브라우니 안 만든담서요.”
“그런 말 한 적 없어.”
“......왜 화가 났어요?”


“내 여행용 트롤리를 장바구니로 전락시키다니. 이 도시, 정말 여러 가지로 용서할 수가 없어.”
“차가 없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어떨 땐 나보다 가방의 효용 가치가 더 큰 거 같아.”
“......”
“이 가방만도 못한 인ㅅ...”
“스톱. 아직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했어요.”


굴 소스 볶음밥 할 수 있댔죠?”
“굴 소스랑 새우랑 피망, 옥수수 집어 와.”
“여기요. 스파게티 면 남아 있죠?”
“토마토소스랑 햄이랑 모짜렐라.”
삼겹살도 괜찮지 않을까요?”
“양상추, 양파, 양송이, 마늘.”
허브 닭다리 구이는 어때요?”
“거부하겠어.”
“왜요?”
“닭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주말에 대체 내게 몇 가지나 만들게 할 셈이야?”
“......”
“......”
“......과일 볶음밥은?”
“아, 그거 재밌겠다. 파인애플 통조림이랑 사과로 어떻게 안 될까?”
“해보면 되죠, 뭐.”


“닭은 왜 안 좋아하세요?”
“먹으면 군소리 없이 먹는데 왠지 질렸어.”
“여기서 닭 먹은 적 없잖아요.”
“동기들하고 모여서 저녁 식사 하면 왠지 늘 닭집에 가.”
“......”
“닭튀김, 찜닭, 불닭, 삼계탕, 닭도리탕, 닭강정, 닭갈비...”


“우린 주로 일식집 가는데. 비싼데 말고 왜, 있잖아요.”
“나도 그게 좋은데 동기 중에 포항 출신인 애가 바다에서 나는 걸 하나도 못 먹어.
“포항 출신인데?”
“친척 중엔 양식장 하는 분도 있을 걸. 내가 친구들과 얼마나 알탕이 먹고 싶었는지 넌 모를 거야.”
“어째서, 왜...포항인데.”
“비린내 난대. 미역도 안 먹어. 바다에서 나는 건 김밖에 안 먹지.”
“......”
“정말이야. 걔네 집에 한번 놀러갔었는데 아주머니가 간만에 회 좋아하는 딸 친구 왔다고 박스에 회를 꾹꾹 눌러 담아 오셨어. 그런데 거짓말 안 하고 내 친구, 친구 동생, 그 친구 언니, 그리고 아주머니까지 아무도 회를 안 먹더군.”
“아니, 그런 아까운.”
“그리고 모두 날 매우 신기한 듯 쳐다봤었지. 남길 수도 없고 해서 필사적으로 먹었는데도 남길래 나중에는 회로 쌈을 싸 먹었어.


“몇 번 버스더라?”
“아까 14번 타고 왔잖아요. 1번하고 14번 밖에 없는데 뭘 맨날 까먹어요?”
“몇 분에 와?”
“12분, 42분요. 슈퍼마켓 처음 와요?”
“내 행동반경을 구속하는 버스 시간 따위.”
“......<닥터 후>에 나오는 실리딘이 어느 별 출신이에요?”
“락사코리코팔라패트리어스.”
“지난 시즌 1화에 나오는 플라스틱 괴물 이름은요?”
네스틴컨셔스니스. 셰도우 선언 15번 조항에 명시된 평화 유지에 대한 약정에 따라 대화를 요청하면 반죽 같은 얼굴을 만나볼 수 있지.”
“애정이 없으면 그렇게까지 될 수 있는 거군요.”
“모든 걸 기억하고 살 수는 없잖아.”


“근데 버스...왜 안 와?
“오겠죠.”
“끊긴 거 아냐?”
“에이, 아직 8신데.”
“여기 보니까 8시에는 19분이 막찬데?”
“지금 몇 신데요?”
“19분.”
“1, 2 분 정도는 늦을 수도 있어요.”
“혹시 지나간 거면 이 가방 들고 그대로 이 도시를 떠나버리는 수가 있어.”
“기차역까지는 어떻게 갈 건데요?”
“......쳇.”


“양배추...양배추...”
“......”
“아아, 춥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
“양배추...양배추 당근 마요네즈 샐러드...데친 양배추 쌈...”
“......”
“양배추 돼지고기찜...양배추...흠, 양배추로 또 뭐 할 수 있지?”
“양배추 안 샀잖아요.”
“......”
“......”
“...바지락...바지락바지락...바둥바둥...바지락.”
“......”
“바지락 칼국수...조개국...해물 스파게티...크램 쵸더...바지락 아욱 된장 찌개...”
“기껏 장 봐놓고 그 중에 없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구상하는 이유가 뭐에요?”


“양배추가 크고 싸고 좋아 보이는 게 있었는데 안 집었어.”
“왜요?”
“양배추 안 좋아하거든.”
“그럼 고민하지 말아요.”
“샐러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타협하는 중이야.”
“그럴 시간에 사 오겠다.”
“미묘해. 움직였다간 차가 올 것 같아.”


“어......”
“......”
“......”
“지금 이거 눈 오는 거냐?”
“독일에서 눈 오는 거 처음 봐요.”
“왜 이제 와서 겨울인 척 하고 그래. 안 오고 잘 버티더니.”
“미란다 신났겠네.”
“미란다가 왜?”
“자기 나라에 눈 안 온다고 이런 싸락눈 내려도 괜히 부엌 창가에 기대서 분위기 잡아요.”
“그럼 오늘은 냄비 치우겠네. 미란다의 냄비 옆에 있으면 분위기 안 나잖아.”
“사실은 아까 치우고 역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버렸어요.”


“자, 이제 뭐부터 하면 될까요?”
“야채 씻고 고기를 굽자. 거기 양상추 썰고 당근 좀 찢어줄래?”
......배고파요? 당근 벌써 자기가 갈고 있으면서.”
“아, 조금. 고기를 썰고 양상추 찢으라는 소리였어.”
“배고프다면서 샐러드에 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요?”
“보통 때라면 들어오자마자 고기부터 굽고 밥을 푼 다음, 일단 그걸 먹으면서 국을 데우고, 샐러드는 잊어버렸겠지.
“근데?”
“이건 내가 인간이고자 하는 마지막 발버둥이야.”
“무슨 소리에요?”
“최소한의 인간성을 유지하고 싶다고. 다른 곳이라면 어떻게 먹든 별 문제없지만 이 동네에서는 오직 요리가 내 최후의 보루란 말이야. 이대로라면...”
“이대로라면?”
“너무 많이 봐서 더 이상 볼 게 없는 노트북을 들고 윈도우즈 미디어 플레이어를 켠 다음 음악 파일이 아니라 시각화를 랜덤으로 돌리면서 감상이나 할 것 같다고.”
“배고파서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거 벌써 어제 해 봤어요.”
“......”



“자, 샐러드. 양상추에 채 썬 당근이랑 데친 브로콜리와 모짜렐라.”
“오호, 무슨 소스에요?”
“플레인 요구르트에 레몬즙이랑 꿀을 넣고 소금과 후추 약간.”
“요구르트 종류가 이렇게 많은 나라에 와서 종류와는 상관없는 플레인 요구르트로 만든 건데, 여기 와서 먹어 본 요구르트 샐러드 중에 제일 맛있어요.”
“지난번에 새로운 걸 시도한다고 넣었던 체리 요구르트가 조금 아니긴 했지.”
“게다가 이 브로콜리 상태, 너무 완벽해.”
“생각해보면 이태리 갔다 오기 전까지는 보통 이런 건전한 식생활을 유지했던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샐러드 양이 메인과 비등했죠. 디저트가 아니라.”


“오늘 눈이 오는걸 보고 비로소 왜 당분 섭취가 급격하게 늘었는지 알았어.”
“왜 그런데요?”
“전에는 ‘조금 있으면 이태리에 간다’는 희망으로 살았거든.”
“......”
“돌아오니 이곳을 너무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이태리도 아닌 주제에 나를 괴롭혀. 이태리도 아닌 주제에 나를 귀찮게 해. 이태리도 아닌 주제에 기차는 갈아타야하고 가끔 연착도 하지. 덩달아 집과 전산실이 말썽을 일으키고, 심지어 슈퍼마켓 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두 대라고.”
“근데 그거 알아요?”
“뭘?”
“이태리에서 만난 유학생들, 독일에 있는 우리를 부러워했다는 거.
“냉정하게 따지면 여러 방면에서 산업적으로 이태리가 독일 따라오려면 한참 걸리는 거 맞긴 해. 근데 상식적인 차원에서, 여기 있는 거랑 이태리 요리 아카데미에서 요리사 수련하는 것 중에 고르라면 어느 걸 고를래?”
“요리사 수련생의 친구가 돼서 빌붙겠어요.”
“......어이.”


“자, 이제 이야기 해주세요.”
“뭘?”
“어제 무슨 이야기 해 준담서요.”
“까먹고 있었다.”
“......”
“이해해. 배고팠어.”
“알았어요.”
“밀크티 끓여 와서 계속 할까?”
“차에 우유 탄 게 밀크티 아니에요?”
“좀 다른 거. 아니, 사실 별로 다르진 않지만.”




<밀크티 마시면서 다음 이 시간에 계속!
...될 지도 모르고 아닐 지도 모르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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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1/27 22:59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9)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5)
하이디와 함께, 세상의 끝에서 일어나는 정신없는 테이블 토크. 주제는 음...잡다하네요. 어쨌거나 오늘도 여전히 실화 농도 99%를 자랑합니다.


“이게 무슨 생과일주스도 아니고. 실화 농도 99%가 뭐에요?”
“그래도 난 너처럼 강판과 거름망으로 만들지는 않아.”
“솔직히 말해서 뭐가 달라요? 언니의 ‘해야 할 일’ 리스트에 이 만담 항목은 없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세상의 끝에서 - 음식 만담 (5)


“미란다가, 미란다가, 미란다가!!”
“뭘 어쨌길래 울면서 들어와?”
“제가 말이죠. 인간적으로 우리도 부엌 좀 깨끗이 쓰자고 메모 남겨놨거든요.”
“드디어 말한 거야?”
“심하게 말한 것도 아니고 ‘먹고 나면 바로 닦는 정도의 센스를 갖는 게 어때?’ 라고 썼단 말이에요.”
“근데?”
“......가보니 미란다의 냄비가 하나 더 늘었어요.”
“......닦지 않은 미란다의 냄비가 두 개. 끔찍한데.”
“아,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요.”
“왜인거야.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대체 어째서 그렇게까지 중국인인 거야.”
“그런 소리 하면 화낼 걸요. 자긴 싱가폴 사람이라고.”
“아니고 싶으면 좀 증명을 하든가.”


“그래서 오늘도 오렌지 쥬스를 만들어왔어요.”
“밥하기 싫었구나. 강판에 갈아서 거름망에 거른 생과일 주스?”
“아뇨, 오늘은 일자한테 믹서기 빌렸어요.”
“빨리 끝나서 싫다며?”
“어제는 특별이에요. 오렌지 쥬스에 팔 혼 따위, 이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요.”
“하긴 피폐한 영혼을 팔아 봤자 쥬스 한 잔도 살 수 없겠지.”
“근데 오늘 일자가 빌려주면서 한 마디 했어요.”
“뭐라고?”
‘너, 요즘 계속 뭘 만든다?’
“묻기는. 전기 오븐에 빵틀까지 사서 남자 친구랑 사과 케이크를 만들려다가 3번이나 실패해서 몽땅 버리는 걸 나는 봤다고.”
“역시 우리만 심심한 게 아니었던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드디어 할 일을 찾았어요.
“뭔데?”
“브라우니를 만들어요.”
“......”
“여기 초콜렛 싸고 좋은 거 많이 팔잖아요.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브라우니 싫어해요?”
“아냐. 그냥, 분명 현재 상황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 뒤 나온 결론이라는 게 손에 잡힐 듯이 보여서, 우린 같은 수업을 듣고 있고 그래서 다음 주까지 보고서를 써내야한다는 사실 따위 상기시켜 제동을 걸어봤자, 어차피 내일이 되면 나도 옆에서 같이 만들고 있겠지, 까지 생각했어.”
“......”
“비슷한 표현으로는 ‘마지막 한 달 동안 제빵수련을 할 셈이냐.’같은 게 있지.”
“......”
“조금 다른 말로는 ‘이대로 내 이글루를 음식 블로그로 만들 생각이야?’ 라든가.”
“하루 정도 브라우니를 만든다고 ‘세상의 끝’에 종말이 오지는 않아요.”
“그거야 그렇겠지. 여긴 이미 끝이니까.”


“이따가 레시피를 찾아올게요.”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여러 개 뜰 텐데 그 중에 에스프레소 브라우니랑 백과사전 브라우니 빼고 초콜릿 많이 들어가는 걸로 몇 개 찍어서 적어오든가.”
“맛없어요?”
“그냥 내 취향이야. 지옥처럼 뜨겁고 죽을 만큼 단거.”
“그건 커피를 위한 상용구잖아요.”
“에스프레소니, 럼이니, 바나나, 아몬드, 헤즐넛 다 필요 없어. 한 입 물었을 때 ‘아, 이거슨 정말 위험한데 말임미다, 슨생님. 하지만 거부할 쑤 없었슴미다, 슨생님.’ 이라고 할 정도로 찐득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 상태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브라우니가 좋아. 뭐, 다른 게 먹고 싶다면 한쪽에 몰아서 넣으면 되고.”
“대체 얼마나 만들어 본 거에요?”
레토르트 정복 사업을 펼치던 와중에 질릴 때마다 브라우니를 만들었거든.”
“우리, 돌아가서도 친하게 지내요.”
“어이.”
“근데 그럼 검색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만들 때마다 다른 레시피를 보고 했더니 기억이 안 나.”


“그나저나 익숙한 냄새가 나는데 뭐죠?”
“참기름과 감자를 듬뿍 넣은 <바지락 미역국>.”
“와, 간만에 국이다.”
“...에서 바지락이 빠졌어.”
“그럼 그냥 미역국인 거잖아요.”
“오늘따라 슈퍼마켓 가기가 귀찮더라고.”
“이럴 수가. 목록에 없는 것부터 집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안 가버리다니.”


“하지만 맛을 보렴.”
“헉, 뭐지. 바다의 시원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시원한데, 이번엔 뭘 넣었어요?”
“후추를 미친 듯이 뿌렸어. 가슴 속 깊이 시원해지도록.”
“아아, 명란젓 계란찜이랑 같이 먹고 싶은 맛이에요.”
“그거 잘 어울리겠네.”
“뭔가 바다가 너무 절실해 지는데요. 초고추장에 굴이랑...”
“......”
열무김치...”
“......이 이상 구할 수 없는 재료를 입에 올리면 국에서 미역을 빼 버리겠어.”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것만은.”


“의식주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셋 다 필수항목이잖아요. 요즘은 굳이 빼자면 ‘주’겠지만.”
“그래? 먹는 거 의외로 중요한 문제였군.”
“하루의 절반 이상을 식에 투자하고 있는 마당에 아닌 척 하긴. 그러는 언니는 셋 중에 뭐가 제일 중요한데요?”
“재미와 감동. 하나 더하면 사변의 쾌락.”
“......”
“좋게 말해 몽상, 바꿔 말해 망상.”
“자기가 물어놓고 선택지에 없는 걸 말하면 어떡해요?”
“진담인데. 특히 시각적 자극은 강도에 따라 식생활 중추를 마비시키지.”
“금강산도 식후경?”
“그 정도가 아니야. 그 왜, 개들은 후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갑자기 강한 냄새를 맡으면 반응을 멈춰버리잖아. 그거랑 비슷해. 어디서 보니까 멧돼지가 공격할 때는 냄새 나는 양말을 들이대면 된다던데, 같은 맥락일걸.”
“......”
“TV에서 봤어. 날 믿어. ‘열 받은 멧돼지를 상대할 땐 양말’.”
“언니를 상대할 때는?”
“어이.”


“히히,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사실 난 그렇게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었어.”
“지금도 밥은 많이 안 먹어요. 디저트를 밥처럼 먹긴 하지만.”
“그건 그냥 당분 공급 없이 이곳에서 맨 정신으로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고.”
“알아요. 그러니까 서로 크림 뿌리는 걸 안 말리고 있죠.”
“아무튼 하루의 메뉴 따위, 이런 식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결정하지 않았어. 미식가 기질이 있다고는 해도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먹는단 말야.”
“에이, 거짓말.”
“정말이야.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래두. 못 믿겠으면 내 지난 여름 2주간의 식단을 봐.

면류 일색이지만 불평 따위하지 않았어.”
“그 아래 글씨는 뭐에요?”
“동생이 쓴 거야. 하루에 ‘냉면-냉면-냉면’이나 ‘치킨-치킨-치킨’인 것만 아니면 메뉴 같은 거 보통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 정도까지 되면 좀 신경 써야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집은 대체적으로 그런데. 언젠가부터 일요일이면 모두 일광욕하는 물개처럼 거실에 누워 ‘어째서 인간은 하루에 세끼를 꼬박 꼬박 챙겨먹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먹지 않을 수 있는 만큼 버티다가...”
“그러다가?”
“서열이 낮은 쪽이 라면을 끓이기 시작해.”
“누가 제일 낮아요?”
“......나.”
“동생 있다면서요.”
“자기 것만 끓여. 그래서 어차피 내가 끓이러 가야 해.”


“라면의 마스터는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어요?”
“응, 근데 다들 취향이 조금씩 달라. 나는 막 익기 시작한 꼬들꼬들한 면을 좋아하고 아버지는 딱 맞게 익은 거, 어머니는 약간 불은 거.”
“교묘하게 세분화되어 있는데, 동생은 어느 쪽이에요?”
“남이 끓인 거면 뭐든.”
“아, 그거 미묘하다.”
“그래서 내가 끓이면 항상 아슬아슬하게 익을랑 말랑한 경계에 있고, 아버지는 딱 맞게. 어머니가 끓이면 아무도 안 먹지.”
“자꾸 물어서 미안한데 동생이 끓이면요?”
“몰라. 자기 것만 끓인다니까.”


“문어(文漁)라는 친구가 있어.”
“언니 이름 한자 보고 사치품이라고 한 그 친구요?”
“응, 대식가 집안에서 자란 식도락가 타입이라 항상 ‘넌 내 3분의 1만 먹고 어떻게 움직이는 거냐.’라고 분노했었어.”
“오호.”
“날더러 필요 이상으로 식탐이 부족하다며 나만 보면 뭔가 먹이려고 들었지.”
“좋은 친구네요.”
“식탐과 수면을 적극적인 오락으로 벗했어, 나 말고.”
“친구 분을 키운 건 팔 할이 식탐이라거나?”
“한번은 식구 4명이 고깃집에 가서 3인분을 먹고 미안해서 국수를 시켜 맛만 보고 나온다는 우리 집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서 ‘엄마, 우리도 한 번 해볼까?’ 했었다지.”
“그래서요?”
“오빠 없이 부모님이랑 3명이 가서, 4인분을 해치우고 밥을 비빈 뒤 국수까지 먹고 나왔다더군. 아무튼 세상에 밥을 그렇게 즐겁게 먹을 수가 없었는데. 하지만 2프로 부족한 게 있었지.”
“뭔데요?”
“절대미감.”
“아깝다, 질보다 양인 거구나.”


“그래서 가끔 내가 밥을 해주면 화를 냈어.”
“어, 왜요?”
“맛있는데 왜 안 해 먹냐고. 나의 식신이 받고 있는 대우는 부당하기 그지없다며 그렇게 학대할 거면 내놓으라더군. 하는 말이 흡사 음식계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같았지.”
“싫다고 했죠?”
“당연하지, 내 장난감이라고. 어쨌든 심지어 그 친구가 나를 위해 써줄 뻔한 이야기도 있었어. 엄밀히 따지면 나에게 쓰라고 종용한 거지만.”
“어떤 건데요?”
“그냥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천재와 범재의 이야기야.”
“해주세요. 우리에게 있는 건 시간밖에 없잖아요?”
“별 얘기 아닌데. 그래도 듣고 싶으면 내일 다시 보자고.”





<시간 나면 내일 들고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근데 그거 끝까지 다 안 썼는데 어쩌자고 이러는 거죠.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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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절세마녀 | 2007/01/26 21:37 | 북쪽통로: 세상의끝 시리즈 | 트랙백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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